피창 순대국 한 양푼에 행복했던 지난 날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43]대사 때 먹던 순대 맛

등록 2003.12.02 17:42수정 2003.12.0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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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에 썰린 내장과 순대
도마에 썰린 내장과 순대김규환
명절이나 대사가 있을 때 예전 시골마을은 오늘날과 사뭇 달랐다. 외식산업과 교통의 발달로 전화만 하면 어디에나 음식을 날라주는 체계가 갖춰지기 전인 1970년대 말까지는 몇 가지 장을 봐와 손수 만들어 푸짐하게 상을 차렸다.


전라도 지역의 경우 대사에는 반드시 빠지지 않았던 음식이 홍어와 돼지고기다. 홍어는 목포와 영산포까지는 지푸라기 넣고 사나흘 옹기에 삭힌 홍어를 결을 따라 도톰하게 썰어 회로 내서 굵은 소금에 고춧가루 섞어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영산강 하구를 떠난 일반적인 대부분 지역은 미나리와 무채를 큼지막하게 썰어 홍어무침인 홍어 채를 내었다. 돼지 두 마리 잡아도 홍어가 빠지면 욕 얻어먹기 일쑤였고, 설혹 내놓았다 하더라도 덜 삭혀졌다면 음식 장만이 소홀했다는 소리를 두고두고 들어야 했다.

간을 보호하기 위해 가슴팍 양쪽에 붙어 있는 갈매기살, 간막이살
간을 보호하기 위해 가슴팍 양쪽에 붙어 있는 갈매기살, 간막이살김규환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돼지고기다. 아녀자들이 집에서 바쁜 동안 남정네들은 동네 앞 냇가에서 돼지를 잡는다. 큰 일을 해 놓아야 맘이 놓이는 법. 돼지발목을 묶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둔탁한 망치로 숨골을 치면 "쾌액-" 소리 몇 번 지르고 두 눈만 멀거니 뜨고 파르르 떨며 죽는다.

이 때 긴 무쇠 식칼로 멱을 따서 빨간 피를 받는다. "콸콸콸" 소리를 내며 선혈(鮮血)이 쏟아져 나온다. 소주 반병, 굵은 소금 서너 줌을 커다란 양푼에 뿌리고 피를 받는다.

피가 거의 마를 즈음에 돼지도 생을 마감한다. 피를 "휘휘" 한 번 젓고는 팔팔 끓는 물을 돼지 몸에 주전자로 골고루 뿌리면서 밥그릇 입구나 나무막대기로 득득 문지르면 털과 때가 밀려 수북히 바닥에 쌓인다.


소금으로 씻은 뒤 밀가루로 한 번 더 씻다.
소금으로 씻은 뒤 밀가루로 한 번 더 씻다.김규환
깔끔히 씻어졌으면 배를 먼저 가르고 내장을 꺼낸다. 우리 지역 사람들의 경우 앞다리다 뒷다리, 또는 비계와 살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장에만 관심이 있으니 제일 먼저 그 쓰디쓴 쓸개를 소주 한잔에 씹지도 않고 "훅" 털어 삼킨다.

내장을 뒤쪽에서부터 잡고 살과 분리를 한다. 이 때가 칼잡이에겐 가장 힘든 과정이다. 통째로 잡고 내장과 몸뚱아리를 구분해 내는 힘든 작업이지만 숙달된 사람에게는 어려울 일이 없다.


오물이 묻지 않게 양쪽 겨드랑이에 붙어 있는 각각 300g 정도 되는 갈매기살(간막이살)을 먼저 떼어내고 큰창자와 작은창자, 위장을 따로 분리해 옆에 둔다. 위로부터 심장, 허파, 간, 이자, 지라, 쓸개, 십이지장, 신장, 암뽕, 된장 등을 물에 씻지 않고 담아 둔다.

신김치를 쫑쫑 썰고 반대로 또 다져야 합니다. 다른 재료도 마찬가지지요.
신김치를 쫑쫑 썰고 반대로 또 다져야 합니다. 다른 재료도 마찬가지지요.김규환
이때 소주 한 잔에 간을 뚝뚝 썰어 안주로 삼는다. 입 주위에 빨간 피가 묻어 있어도 문제될 게 없다. 구경꾼이 열댓 명이므로 입에 들어가는 순간 한두 번 씹으면 스르르 녹는 간은 순식간에 없어진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이었던 내가 심장질환이 있다고 언제나 지라를 맡아 놓으셨다. 처음엔 생으로 몇 번 먹어봤다가 이내 물리는지라 굵은 소금만 뿌려 2∼300g 되는 지라를 혼자서 꾸역꾸역 먹어치웠던 돼지 잡던 날은 그렇게 물리도록 고기를 먹는 고역도 감수해야했다.

당시는 집집마다 구정물 먹여 한 두 마리 키운 까만 돼지라 기생충은 조금 있었을지언정 구제역이고, O-157균 등 인체에 치명적일 이유가 없었으니 돼지고기 살도 회로 즐기기도 했다. 얼마나 고소했던지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식은 찰밥을 넣고 나머지 다진 채소를 넣고 뒤섞어요. 선지피가 좀 부족하죠? 뒤늦게 작정을 한 탓입니다.
식은 찰밥을 넣고 나머지 다진 채소를 넣고 뒤섞어요. 선지피가 좀 부족하죠? 뒤늦게 작정을 한 탓입니다.김규환
이제 내장 부위는 다 걷어내고 발과 머리 그리고 몸통만 남았다. 머리를 먼저 떼어 내고 네 다리 끝을 도려낸다. 사지를 하나씩 가르고 갈비 부분을 두 쪽으로 나누면 돼지 잡는 일은 거의 끝나간다. 칼집을 내서 새끼줄을 넣고 꼬아서 처마 밑에 걸기 좋게 해놓고선 본격적으로 오늘의 주인공 창자를 씻는다.

창자에 든 오물을 "쭈욱" 손으로 훑어 제거하고 뒤집어 가며 몇 번 씻어주고 마지막으로 왕소금으로 한번 밀가루를 넣고 한번 씻으면 냄새마저 별로 나지 않는 대창과 작은 창자가 한 양동이 가득하다.

여기서 대체로 남정네들의 일이 끝나고 돼지고기를 앞다리, 뒷다리, 갈비 살 하나씩을 넣고 삶는 일을 한 사람이 맡고 상가에 필요한 비품을 만들거나 시집 장가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품목을 점검하는 자리로 돌아간다.

깔대기 대용으로 펫트병 입구를 잘라 사용해도 무방
깔대기 대용으로 펫트병 입구를 잘라 사용해도 무방김규환
그 사이 아주머니들은 순대에 들어갈 양념을 만드느라 바쁘다. 신김치에 콩나물을 데치고, 당면을 잘게 썰고 찹쌀밥을 되직하게 해서 식혀 선지에 넣고 마늘, 생강 넣고 소금, 된장, 간장으로 간을 마저 한 다음 휘저어 고루 섞은 다음 깔때기로 받치고 지푸라기로 한쪽을 막고 양념을 집어넣어 내용물을 채운다.

"아따 잘 좀 잡아 보랑께."
"이녁(자네 또는 그대의 뜻)이 넣는 게 서툴구만…. 이리 줘봇쇼."
"아따매 그게 아니랑께. 주댕이만 잘 잡고 있으면 되는디…."
"국물이랑 한꾼에(한꺼번에) 넣어야제."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창자를 만진다는 느낌에서 벗어나 하나 둘 만들어진다. 한 팔 길이로 차면 지푸라기로 묶어 조심히 큰 통에 담고 만들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개수만 해도 10개가 넘으니 2인 1조로 너덧 명이 달라붙어 순식간에 해치워야 닦달하는 사람이 없다.

하나씩 1차 완성품이 만들어지고
하나씩 1차 완성품이 만들어지고김규환
끓는 물에 된장을 풀고 순대와 내장을 모두 넣고 삶는다. 30분 정도 지나면 내용물이 부풀어올라 터지는 수가 있으니 대침으로 순대 곳곳에 침을 놓아준다. 계속 삶아 1시간 정도 지나면 꺼내 식혀서 둥글게 썰면 애어른 할 것 없이 몰려든다.

온 동네 사람들이 덕석(멍석) 위에 앉아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다. 펄펄 끓고 있는 마당 한 켠에 걸린 가마솥에서 남자 어른이 꺼내주면 커다란 도마에 순대와 같이 삶은 내장을 뚝뚝뚝 썰어 종류별로 채반이나 함지박에 담는다.

"야 이놈들아! 뽀짝거리지(성가시게 가까이 접근함) 좀 마라."

칼잡이 아주머니의 호통이 떨어지면 잠시 물러나 있을 뿐 고기 맛 아는 아이는 모두 한 마음 한 뜻이다.

가마솥에 순대와 내장이 익어갈 무렵 사람들이 하나둘 하던 일을 멈추고 몰려 듭니다.
가마솥에 순대와 내장이 익어갈 무렵 사람들이 하나둘 하던 일을 멈추고 몰려 듭니다.김규환
덕석마다 서너 개씩 저녁상이 차려지면 부위별로 조금씩 나눠 담고 달걀 노른자와 흰자를 나눠 지단을 채 썰어 옆옆이 놓고 실고추를 조금 뿌려 미각을 돋군다. 이어 국물만 퍼서 담아 오는 순서대로 앉아 먹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밥 먹자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거동이 불편한 몇몇 노인들만 빼고 동네 사람 대부분이 모여 한꺼번에 노란 양푼에 가득 담긴 순대국에 고봉밥 한 그릇씩을 말아먹는 그 맛. 더러는 부드럽고 혹은 쫄깃하며 때론 야들야들, 오도독 씹히는 온갖 내장이 혀를 휘휘 감고 돈다. 내장과 기분 좋게 어우러진 순대의 교감은 배고픈 시절 왜 그리도 맛있었던가.

삽시간에 "후루룩" 떠먹고 자리 훌훌 떠나는 사람들. 고깃국 중 최고의 음식이었으니 대감이 부럽지 않고, 대장금(大長今) 수라상도 저리 가라 한다. 그 맛을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이제는 비록 그 맛과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나는 가끔 돼지 잡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순대 먹고 싶은 강한 유혹에 빠지곤 한다. 어디 좋은 데 없을까?

순대와 내장을 썰어 한접시 먼저 소금에 찍어 먹고 나중에 국물에 넣어 밥 말아 먹으면...
순대와 내장을 썰어 한접시 먼저 소금에 찍어 먹고 나중에 국물에 넣어 밥 말아 먹으면...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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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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