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을 잃지 않는 꽃 '수선화'

내게로 다가온 꽃들(12)

등록 2004.01.02 07:39수정 2004.01.0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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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갑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첫 번째 꽃은 어떤 꽃으로 해야 할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 제주에서 요즘 한창 몽우리를 올리고 있는 수선화로 정했습니다.

제주에서는 겨울이 시작되는 12월부터 수선화가 피기 시작해 2월말 봄꽃이 흰눈을 녹이며 필 때까지 수선화가 핍니다. 고난의 계절 '겨울'에 피어나는 꽃이라서 그런지 그 향기는 마치 입안에 씹히는 듯 진합니다.

겨울은 추워야 겨울답고 여름은 더워야 여름답다고 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 지나야 해충도 적고, 꽃의 향기와 색깔도 진하다고 하니 '고난'이라는 것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아닌 듯합니다.


수선화는 한송이씩 이어서 핍니다. 이 사진부터 아래 네 번째까지는 같은 수선화를 이어서 찍은 것입니다.
수선화는 한송이씩 이어서 핍니다. 이 사진부터 아래 네 번째까지는 같은 수선화를 이어서 찍은 것입니다.김민수

수선화는 피기 시작하면 한 송이씩 순서대로 피어납니다. 한 송이인가 싶다가 어느 날 바라보면 두 송이가 바라보고 있고, 곧 세 송이가 고개를 살포시 숙이며 '안녕'하고 향기로운 인사를 합니다.

수선화는 지선(地仙), 수선(水仙), 천선(天仙) 중에서 천선을 제외한 두 가지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지선화'라고도 부르고 눈 속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하여 '설중화'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름도 있는데 꽃의 모양새를 보시면 은쟁반에 금잔을 하나 올려놓은 형상이라서 '금잔옥대' '금잔은대'라는 이름도 얻었답니다.

모두가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꽃 이름과 향기에 걸맞게 꽃말도 '자아도취'와 '자존심'입니다. '자아도취'는 수선화와 관련된 신화에서 아름다운 미소년 나르시스가 호수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는 것에 연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먼저 수선화와 관련된 전설을 들어 보실까요?

김민수

어떤 요정들의 유혹에도 눈을 돌리지 않는 나르시스라는 아름다운 청년이 있었단다. 그런데 이 청년을 에코라는 여신이 사랑하게 되었어. 그러나 에코 여신의 이름 때문일까? 나르시스에 대한 사랑의 고백은 늘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지. 사랑이 분노로 바뀌게 되어 복수의 여신에게 부탁하여 나르시스를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단다.

복수의 여신도 아름다운 청년 나르시스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같은 여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그 청을 들어주었지. 어느 날 나르시스는 수면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어. 잡으려 했지만 도저히 잡을 수 없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사랑했던 나르시스는 결국 상사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고 그 곳에 핀 꽃이 바로 수선화란다.


2004년도 첫 날  첫 번째로 카메라에 담긴 수선화입니다.
2004년도 첫 날 첫 번째로 카메라에 담긴 수선화입니다.김민수

수선화의 또 다른 꽃말은 '자존심'입니다. 고난의 계절 겨울에 피어나 봄이 오기까지 피어 겨울과 봄이 맞물려 있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수선화.


새해에는 우리들의 삶에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에 자신의 '자존심'을 파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지난 날의 일이지만 지난 계미년(2003년)에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국제적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새해에는 '자존심'을 회복하는 해가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수선화를 소개합니다.

역광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역광으로 찍은 사진입니다.김민수

첫 해를 시작하는 날, 조간 신문 지면에서 책을 선전하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아침형 인간이 성공한다는 것과 열두 살 어린아이가 천만 원을 모았다는 광고였습니다. 두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또 그런 내용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빨리빨리 살아가라는 이야기는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서구에서 열두 살에 부자가 된 아이가 나오니 우리 나라에서도 그런 아이 하나쯤은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닌지 섬뜩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물질이 주인이 되어 행세하는 마당에서, 인간의 자존심이고 뭐고 물질 앞에서 다 무너진 현실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는 독자들이 감내해야 할 절망감은 어떤 것인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할 것도 같습니다.

조금은 저 자신에게도 힘들고 버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새해에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웠으면 합니다. 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웠으면 좋겠습니다. 물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최소한의 자존심마저도 내팽겨치고 온갖 거짓과 술수를 능력인 것처럼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민수

수선화에게 주는 정호승 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이제 곧 봄이 오면 수선화도 자기의 자리를 비켜주고 또 다른 겨울에 피어날 준비를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모습도 미련 없이 때가 되면 비켜주는 모습 또한 아름다운 꽃들을 만나면 '안녕'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나누시고 그들이 들려주는 잔잔한 삶의 소리를 들어보는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새해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선희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로 주중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과 생활하다가 주말은 돋보기 들고 들에 나아가 꽃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화폭에 담아 응접실에 걸어놓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색연필로 들꽃을 그린 지 4년째입니다. 예쁜 카드(현재 3집까지 나왔음)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꽃 소개할 뿐만 아니라 카드를 팔아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기사까지의 기금] 220,000원

덧붙이는 글 이선희 선생은 초등학교 교사로 주중엔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과 생활하다가 주말은 돋보기 들고 들에 나아가 꽃 관찰하며 이야기 나누고 그러다 화폭에 담아 응접실에 걸어놓고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색연필로 들꽃을 그린 지 4년째입니다. 예쁜 카드(현재 3집까지 나왔음)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꽃 소개할 뿐만 아니라 카드를 팔아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 있습니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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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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