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36

등록 2004.01.20 14:51수정 2004.01.20 14:55
0
원고료로 응원
"그래, 신님들은 오셨더냐?"
재상이 자기 생각을 떨어내며 아들에게 물었다.
"예, 저에겐…."

에인이 막 오룡거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였다. 언제 따라왔는지 등 뒤에서 은 장수가 기척을 알렸다.
"저 재상어른…."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자 은 장수가 옆으로 다가서며 뒷말을 이었다.


"여태 기회를 얻지 못해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저에게 태왕마마의 전언이 계십니다."
"그래요? 어떤 전언이셨는지 어서 말해보시오."
"태왕마마께서 우리군사는 모두 정벌지까지 에인 장군님과 동행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모두라면 그대들까지 말이오?"
"그러합니다. 먼저 온 강 장수 군사들과 저희들까지 모두 합쳐서 동행함은 물론이고, 저희들이 장군님의 주력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분부하셨습니다."

은 장수는 계속해서 '자기들이 에인장군을 보필함은 물론이려니와 가장 용맹스러운 군사들로서 그 명예를 지키도록 하라는 분부'까지도 모두 전했다.
"역시 혜왕이시오."
아버지가 그렇게 대답하자 은 장수가 다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재상어른께서도 그대로 결정을 하시는 것입니까?"
"물론이오. 지엄하신 분부를 누군들 거역하겠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재상과 강 장수도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있었던 터였다. 다시 은 장수가 바쁘게 물어왔다.
"그러면 어서 강 장수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위계로 따지자면 강 장수가 그의 직계 대장이었다. 말하자면 모든 보고나 질문도 먼저 자기 대장에게 알려야 했으나 이번 일은 왕의 지시라 자기 순서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은 장수는 모든 사실을 자기 대장에게 어서 빨리 알리고 싶었고, 만약 재상이 허락한다면 당장 달려갈 참이었다. 한데 재상의 대답은 이미 확정이 나 있었다.

"걱정 마시오. 그도 이미 그렇게 준비하고 있소이다."
"벌써 준비를요?"
"그대들이 강 건너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강 장수가 '천신이 도왔다'고 말했소이다."
"천신이 도우셨다면, 그렇다면 강 장수께서도 일찍부터 우리를 기다리신 것이란 말씀입니까?"
"그렇소. 자세한 것은 곧 알게 될 것이오. 자, 이제 그만 어서 가봅시다. 강 장수가 기다리고 있소이다."


재상은 걸음을 빨리해 한 천막으로 향했다. 여러 채의 천막을 지나 중앙에 따로 세워진 큰 천막 앞으로 향했다. 그 앞에는 횃불을 든 군사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군사가 재상에게 말했다.

"천막은 아무래도 좁아 강둑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군사가 일행들을 안내했다. 강둑으로 오르자 바로 지척에 큰 화톳불이 보였다. 강 장수는 그 화톳불 이쪽에 휘하 군사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강 장수는 소호 국에서도 최고 장수였다. 전략에도 뛰어날뿐더러 인내심도 강해 한 자리에서 한달을 버티어 기어이 성을 탈환한 전력도 있었다. 그것이 20년 전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무 두 살에 직급은 아장이었다.

당시 침략자들은 북방에서 쳐내려온 수렵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독화살을 사용할줄 알았고 그래서 큰 성읍의 수장을 단숨에 제거한 뒤 그 성을 차지했으며 강 장수 일행이 당도했을 때는 이미 토성의 망루엔 그들 집단의 표시인 곰 가죽까지 걸려 있었다.

강 장수의 대장이 전사한 것도 그때였다. 군사들이 막 토성의 망루에 불을 붙이려던 그 순간에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려 그 아래쪽 군사들을 전멸시켰고 그때 독화살 하나가 날아와 멀찌기 서 있던 대장의 목까지 꿰뚫은 것이었다. 대장은 죽어가면서도 그에게 말했다.

'이곳을 포기하면 다음 성읍도 넘어간다. 버텨라. 그리고 반드시 탈환하라.'
그는 곡물과 식량반입을 차단하고 부하들을 독려해 한 달간이나 토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침내 침략자들도 더 견디지 못하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적들은 늘 고기만 먹고 살아 성질이 급했고 배고프면 아무것이나 잡아먹으며 굶주림을 해결하는 종족이었다. 인내심이나 수비에 대한 지략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짐승도 숨어드는 그 긴 겨울이 지겨워, 한 자리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려보고 싶어 이처럼 성읍 하나를 탈취했던 것인데 안정보다 먼저 굶주림이 공격해 그들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나머지 군사들도 곧 올 것이오."
강 장수가 벌떡 일어나자 재상이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상단에 마련된 의자로 향했다. 강 장수도 에인도 아버지 뒤를 따랐다. 상단에는 의자 네 개가 마련되어 있었고 강 장수는 왼쪽에 에인은 재상의 오른쪽 의자로 가 앉았다.

에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군사들을 둘러보았다. 불빛에 번들거리는 얼굴들이 아주 건강해보였다. 자기들보다 일찍 떠났고 객지생활도 그만큼 더 길었을 텐데 크게 힘든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나머지 일행들도 강둑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비워둔 자리에 차례로 앉았고 제후는 재상 옆에 비워둔 의자로 다가와 앉았다. 모두 도착해서 자리가 진정되자 아버지가 강 장수에게 일렀다.
"강 장수 이제 시작해도 좋겠소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