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커서 떠나면 말짱 황이여"

정초부터 '인생 무상' 이야기를...

등록 2004.01.08 07:54수정 2004.01.0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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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마지막 날 딸아이가 집에 왔다. 겨울방학을 맞은 덕이었다. 말이 겨울방학이지 고작 4일 동안만 집에 머물고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방학도 아닌 셈이었다.

딸아이는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왔다. 고작 며칠 동안 머물 터인데도, 그 안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15분 거리를 걸어오면서도 딸아이는 아빠를 부르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는 딸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며 왜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하니, 딸아이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뭐 하러 그래요. 별로 힘들지도 않은데."

그러는 딸아이가 고맙고 대견스럽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그 서운한 마음이 또 얄궂게도 느껴져서 조금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딸아이는 4일 오후에 천안으로 돌아갔다. 딸아이를 버스터미널에 태워다 주고 돌아오는데 또 가슴 한구석이 짠하게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딸아이를 타지에다 놓고 산 세월이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가고, 딸아이가 잠깐씩 집에 왔다 간 적도 여러 번이건만, 딸아이를 떠나 보낼 때마다 여전히 내 마음이 허전해지고 아이가 안쓰러워지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괜히 아리송해지는 마음이기도 했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그런 말을 했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딸아이를 보낸 다음의 편치 않은 심사가 여전함을 하소연한 셈이었다. 그런 내게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갖다가 부모 맴이라고 허는 거여. 그런 부모 맴이 워디 갈 디가 있간디."


<2>

지난 3일 저녁 상조회 모임에 참석했다. 모임 일시가 매월 3일 저녁으로 붙박인 모임이었다. 고장의 토박이들, 같은 초등학교를 모교로 하고 있는 10년 안쪽 선후배들 70명이 의좋게 꾸려가고 있는 상조회였다.

그 상조회에서 우리 기수는 최고 고참이었다. 처음부터 상여 메는 일 등은 면제되고, 모임 때마다 인사 받기가 바쁠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접을 받는 처지였다.

모임에 늦게 참석한 동기 친구 덕에 모임이 파한 후에도 동기들 여럿이 남아 한동안 얘기꽃을 피웠다. 해가 바뀌었으니 한 살씩 더 먹고, 한 살씩 더 먹은 그 나이들이 얼굴에 좀더 잘 나타나 보이는 듯한 동기들이었다.

나야 제 나이에 초등학교 입학을 해서 아직 오십대 중후반에 걸려 있지만, 대개는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게 된 처지들이고, 해가 바뀐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올해 환갑을 먹게 된 동기도 있었다.

외아들을 천주교 신부로 보낸 친구 하나와 나를 제외하고는 이미 모두 며느리나 사위를 본 처지들이라서, 한 친구의 입에서는 손자 돌보는 이야기도 나왔다.

친구들 대개가 이미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이,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며 손자를 돌보는 그 정경이 아직은 내게 이상한 '징그러운' 느낌 같은 것을 안겨 주었지만, 나는 친구들의 이런저런 얘기를 재미있게 듣기만 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애들 키워서 다 내보내구 나면 말짱 황이여."

"말짱 황이라니? 그게 뭔 뜻이라나?"

나는 짐작되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굳이 물었다.

"애들 커서 떠나구 나면 집은 텅 비게 되는 거구, 사는 게 별루 재미두 읎구, 세상이 허무헤진다니께. 그걸 꼭 말루 설명을 허얀다나?"

나는 아직 대꾸를 못하고 있는데, 친구들은 하나같이 동의를 했다.

"그려. 맞어. 애들 커서 떠나구 나면 말짱 황이여."

그리고 한 친구가 나를 지목하며 말했다.

"자네는 아직 그런 거 물를 겨. 애들이 아직 어리니께."

"그래서 난 아직 젊어. 내가 오래도록 젊게 살 욕심으루다가 장가를 늦게 든 겨."

나는 제법 의기양양한 투로 대꾸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그 말두 맞어. 애들이 어린 덕에 아버지가 나이보다 젊게 산다는 말두 일리 있는 말이여. 허지만 그 세월두 잠깐이여. 애들 크는 것 보면 세월이 빠르다는 걸 알 수 있으니께."

"그러니께 나보구 지금, 애들 어려서 아직 젊게 사는 이 세월을 너무 자랑허지 말라는 소린감?"

"내가 그 말을 꼭 헤야 헌다나?"

"이미 다 헸으면서 뭘…."

그리고 나는 웃었다. 친구들도 함께 웃었다.

그때 다른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만 상조회를 허는 줄 알었더니, 제금 나가 사는 우리 아들두 상조회를 헌다구 허데."

"누구, 아버지 목으루?"

"그럴 테지, 뭐."

"그려? 자네, 효자 아들 두었네."

"애가 효자 노릇을 허는갑다 싶으면서두 기분이 묘해지더구먼. 흐흐흐."

기분이 묘해지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것은 다른 친구들도 모두 마찬가지일 터였다.

자리가 파하고 친구들과 헤어진 다음 상조회장으로 수고하는 친구와 함께 걸음을 하며 내가 말했다.

"우리가 정초부터 인생 무상 이야기를 너무 많이 헌 거 아녀?"

"그러면서 사는 거지, 뭐. 우리가 상조회를 허는 것두 다 인생 무상 때문이구…."

친구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한마디를 더 했다.

"인생 잠깐이니께, 죄 짓지 말구 바르게 살어야 혀."

"옳은 말이여."

어느새 우리는 다정한 연인처럼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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