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오는 날, 시골은 바빠집니다

등록 2004.01.08 10:31수정 2004.01.0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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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올 겨울도 첫눈이 시작되었습니다.


겨울날, 눈 내리는 건 당연한 일이건만 나이 들면 꾀만 는다고, 시골살이도 나이가 들면서 처음의 긴장과 부지런함이 느슨해지며 '올 겨울은 어찌어찌 눈 없이 지나가지 않을까. 온다 해도 스르르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리지 않을까.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저런 핑계만 붙여봅니다.

a 밤새 몰래 내린 도둑눈

밤새 몰래 내린 도둑눈 ⓒ 이형덕


이런 생각은 나뿐만이 아닌가 봅니다. 많지 않은 눈이라도 첫눈 내리는 날이면 모두 정신없이 헤매게 됩니다. 여기저기 미끄러진 차들, 엉금엉금 기어가는 차들….

한겨울에 발이 빠지도록 내리는 눈에도 이런 소란은 일어나지 않건만 어찌된 일인지 첫눈이면 이 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온 이국민처럼 당황하고, 이리저리 어쩔 줄을 모릅니다.

a 나뭇가지에 핀 눈꽃

나뭇가지에 핀 눈꽃 ⓒ 이형덕


시골에 살면 겪게 되는 겨울의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온통 세상이 눈에 덮여 있고, 마을에 드나드는 버스도 아예 눈이 녹는 봄까지 드나드는 것을 거르기도 합니다.

멀쩡하던 보일러가 하필이면 쨍하니 추운 날에 고장나는 일은 또 무슨 해괴한 하늘의 뜻이며, 수도가 얼어 끓는 물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왕겨를 구해 불을 놓기도 합니다.


모진 추위에 닭이 얼어죽기도 하고, 푸짐히 내린 눈에 눌려 애써 만든 비닐하우스가 내려앉기도 합니다.

a 얼마 전에 매달아 놓은 새장에도 흰눈이 덮였다.

얼마 전에 매달아 놓은 새장에도 흰눈이 덮였다. ⓒ 이형덕


열쇠 하나만 가지고 드나들던 도시의 아파트 생활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모든 걸 내 손으로 챙기고, 고치고, 장만해야 하는 겨울나기가 만만한 일은 아니지요.


이런 줄 알면서도 일하기 좋은 가을날을 베짱이처럼 보내고, 내일, 내일로 미루다가 막상 코가 쨍하니 추워지면 마음도 그와 같이 바빠지다가 덜커덕 눈이라도 수북히 쌓여야 비로소 게으른 몸을 움직이게 되는 걸 보면 겨울은 아무래도 눈이 와야 실감이 나나 봅니다.

지난 번, 자동차에 깔려 부러진 넉가래도 손을 보아야 하고, 몽당붓이 되어 버린 마당비도 새로 장만해야 합니다. 지붕 가까이까지 웃자란 낙엽송 가지도 지붕에 올라가 잘라내야 합니다. 버려 두었다가 거기 쌓인 눈을 못이기고 뚝 부러지는 날이면 지붕에 구멍이 날 판입니다.

섣부른 어미 노릇을 하는 암탉이 며칠 전 세상에 내놓은 때아닌 병아리들도 어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하고, 묶어 놓은 강아지들이 마실 물도 꽁꽁 얼어붙었으니 더운 물로 녹여 주어야 합니다.

언덕 오르막에 모래주머니도 쌓아 두어야 하고, 빙판이 되기 전에 기름차도 불러 보일러 기름통을 가득 채워야 하고, 어린 나무들에겐 늦었지만 헌 양말로 벌레집이라도 동여 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름부터 미루어 오던 화목 작업을 위해 엔진 톱도 빌려 놓아야 하고, 덤불에 덮여 들어가지 못하던 숲에서 고사목이나 갈비도 긁어와야 하고, 장마비에 그대로 적셨다가 지난 번, 목이 부러진 도끼도 새로 자루를 끼워 두어야 합니다.

아, 왜 이런 일들을 나는 까맣게 미루고 있다가 첫눈이 내리고서야 한꺼번에 기억을 되살리는 걸까요. 그 희고, 푸짐한 눈이 오만가지 잡다한 세상사로 얽힌 머리를 단번에 말끔히 비어 놓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a 오미자 밭에 내린 눈

오미자 밭에 내린 눈 ⓒ 이형덕


첫눈 오는 날.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다 겨우 숨을 돌리며, 아직 남아 있는 흰눈을 보며 나는 오래 전 도스(DOS) 시절에 배운 명령어 하나를 생각해 냅니다.

'CLS'(화면 지우기)

그렇게 첫눈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형덕(이시백) 기자는 물골에서 살며 겪은 일들을 모아 '시골은 즐겁다(도서출판 향연)'라는 책을 묶어 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형덕(이시백) 기자는 물골에서 살며 겪은 일들을 모아 '시골은 즐겁다(도서출판 향연)'라는 책을 묶어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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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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