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매달아 놓은 새장에도 흰눈이 덮였다.이형덕
열쇠 하나만 가지고 드나들던 도시의 아파트 생활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모든 걸 내 손으로 챙기고, 고치고, 장만해야 하는 겨울나기가 만만한 일은 아니지요.
이런 줄 알면서도 일하기 좋은 가을날을 베짱이처럼 보내고, 내일, 내일로 미루다가 막상 코가 쨍하니 추워지면 마음도 그와 같이 바빠지다가 덜커덕 눈이라도 수북히 쌓여야 비로소 게으른 몸을 움직이게 되는 걸 보면 겨울은 아무래도 눈이 와야 실감이 나나 봅니다.
지난 번, 자동차에 깔려 부러진 넉가래도 손을 보아야 하고, 몽당붓이 되어 버린 마당비도 새로 장만해야 합니다. 지붕 가까이까지 웃자란 낙엽송 가지도 지붕에 올라가 잘라내야 합니다. 버려 두었다가 거기 쌓인 눈을 못이기고 뚝 부러지는 날이면 지붕에 구멍이 날 판입니다.
섣부른 어미 노릇을 하는 암탉이 며칠 전 세상에 내놓은 때아닌 병아리들도 어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하고, 묶어 놓은 강아지들이 마실 물도 꽁꽁 얼어붙었으니 더운 물로 녹여 주어야 합니다.
언덕 오르막에 모래주머니도 쌓아 두어야 하고, 빙판이 되기 전에 기름차도 불러 보일러 기름통을 가득 채워야 하고, 어린 나무들에겐 늦었지만 헌 양말로 벌레집이라도 동여 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름부터 미루어 오던 화목 작업을 위해 엔진 톱도 빌려 놓아야 하고, 덤불에 덮여 들어가지 못하던 숲에서 고사목이나 갈비도 긁어와야 하고, 장마비에 그대로 적셨다가 지난 번, 목이 부러진 도끼도 새로 자루를 끼워 두어야 합니다.
아, 왜 이런 일들을 나는 까맣게 미루고 있다가 첫눈이 내리고서야 한꺼번에 기억을 되살리는 걸까요. 그 희고, 푸짐한 눈이 오만가지 잡다한 세상사로 얽힌 머리를 단번에 말끔히 비어 놓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