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마 이거 혹시 프락치 아이가?"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29>공장일기(19)

등록 2004.01.08 13:00수정 2004.01.0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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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당시 나는 <남천문학>동인들과 인근 계곡 등지를 찾아다니며 <마산문화> 문학팀에서 토론한 것을 재학습했다

당시 나는 <남천문학>동인들과 인근 계곡 등지를 찾아다니며 <마산문화> 문학팀에서 토론한 것을 재학습했다 ⓒ 이종찬

"아니, 노트에다 이런 무시무시한 글로 써놓아도 되나? 혹시 누가 보고 이르모(일러주면) 우짤라꼬 그라노?"
"사실이 안 그렇나. 아무리 뼈 빠지게 일을 하모 뭐하노? 날이 갈수록 생산량이 자꾸 빚처럼 늘어나기만 하는데. 그라고 다른 부서에 한번 가봐라. 그기 바로 지옥이지, 오데 사람이 일로 할 수 있는 곳이더나?"

사출실로 부서를 옮긴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그동안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잔업과 철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나는 타 부서에 비해 작업환경이 좋은 사출실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점점 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출실의 모든 업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보안대 신사(?)와 총무부장 앞에서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냄과 동시에 해체했던 사내문학동인회 <시심>(詩心)의 구성원들을 은밀하게 불러내 <남천문학동인회>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장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시를 쓰더라도 시를 보낼 때가 없었다. 왜냐하면 80년 8월에 <씨알의 소리>를 비롯해 <창작과비평>, <문학과 지성> 등 주요 계간 문예지가 모두 강제 폐간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때부터 새로운 문예지의 등록에 족쇄를 채우는 언론기본법이란 게 등장했다.

"말만 신고제지 실제로는 허가제 아이가."
"그라지 말고 우리도 이 참에 힘을 합쳐가꼬 <실천문학> 같은 종합무크지로 하나 만들어뿌자. 무크지는 언론기본법에 해당이 없다 카더라."
"그래. 우리도 만날 서울 문예지들 눈치만 볼 끼 아이라 아예 우리 지역에 걸맞는 그런 독창적인 종합무크지로 하나 만들어뿌자."

내가 사출실로 옮긴 그 이듬 해, 그러니까 1981년 초부터 마산을 중심으로 창원, 진해 등지에서 활동하는 비교적 진보적 성향을 지닌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 우리 지역의 양심을 대변하는, 일종의 언론 역할까지 겸하는 종합무크지를 하나 만들자는 이야기가 은밀하게 오가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종합무크지 <마산문화> 창간추진위원회에서는 <마산문화>를 1년에 한 권씩 발행한다는 목표 아래 각 분야별로 조직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문학팀 소속이었다. 문학팀에는 시인 이선관, 김종석, 최명학, 유동렬, 이월춘, 이재업, 정완희, 문화평론가 박진해, 박영주가 참여했다.


그 중 시인 이선관 선생은 마산문단 쪽을, 김종석과 박진해는 타 쟝르와의 지속적인 연대와 교류를, 시인 최명학은 수출자유지역을, 시인 이월춘은 진해지역을, 나는 창원공단을 맡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각자 맡은 바 조직구성에 들어감과 동시에 일주일에 한 번씩 본격적인 학습과 창작품 토론에 들어갔다.

"모두들 각별히 몸조심 해라이. 그렇찮아도 보안대에서 건수 하나 올릴라꼬 눈이 벌개가꼬 설치고 있은께네."
"그라이 인자부터 우리끼리 만나거나 전화로 할 때에는 익명을 쓰는 기 안 좋것나."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었다. 모임을 할 때도 평소 자주 만나는 다방에서 자연스레 모였고, 더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할 때면 구성원들의 집에서 모였다. 또한 정해진 시간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늦거나 주어진 학습을 불성실하게 해 오는 이들에게는 줄빳다를 쳤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은 아마도 마산에 있는 000다방에서 모임을 할 때였을 것이다. 그런데 구성원 중 한 사람이 진지하게 토론을 하는 도중에 자꾸만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마다 누군가와 비밀스런 통화라도 하려는 것처럼 자꾸만 자리를 비우는 것이었다.

"니, 오늘 속이 좀 안 좋나? 와 자꾸만 화장실로 들락거리노?"
"…"
"일마 이거 혹시 프락치 아이가?"
"절마 저거 주머니 한번 뒤집어 봐라. 내가 보기에는 절마 저기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이야기로 녹음을 하는 거 같다."

아니나 다를까. 그 구성원의 윗주머니에서 손바닥 반만한 크기의 녹음기와 함께 녹음테이프 서너 개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녹음테이프에는 그날 우리가 토론했던 내용들이 고스란히 녹음이 되어 있었다. 그 구성원이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비운 때만 빼놓고는 모두.

"봐라. 내가 옛날부터 일마 이기 쪼매 이상하다 안 카더나."
"그…그기 아이고예. 토론내용이 쪼매 에러바서(어려워서) 집에 가서 한번 더 들으면서 공부로 할라꼬 그랬습니더."

그랬다. 그날, 그 구성원은 그동안 우리끼리도 서로 의심쩍어 했던 모든 죄를 한꺼번에 뒤집어 써야만 했다. 그동안 우리 모임의 내용이 자꾸만 보안대 쪽으로 새 나간다는 그런 죄까지 모두. 그날, 그 구성원은 꼼짝없이 줄빳다 세례를 맞은 뒤 우리 모임에서 곧바로 제명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문학팀 구성원들은 보안에 더욱 철저하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 구성원들끼리 쓰던 익명도 모두 바꾸고, 모임장소도 아예 구성원들 집을 번갈아가면서 모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용한 내 익명은 민노(民勞)였다. '민주노동투사'라는 그런 뜻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훌쩍 흐른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그 구성원은 아무 죄가 없었다. 그 구성원은 정말 순수하게 집에서 공부를 더하기 위해 우리들의 토론내용을 녹음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 순간의 의심이 빚어낸 정말 한심한 결과였다. 아니, 그만큼 그 시절이 가혹했다는 것을 반영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라모 그때 누가 보안대에 꼬치꼬치 일러바쳤단 말이고?"
"그건 저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우리 딴에는 그렇게 철저히 한다고 했지만 보안대가 처놓은 그물망을 못 비켜간 것이겠지요."

덧붙이는 글 | <계속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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