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아도 좋은께네 퍼뜩 일어나거래이"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30> 장닭

등록 2004.01.12 13:21수정 2004.01.1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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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요즈음에는 닭들이 모이를 쪼는 이런 풍경도 보기가 힘들어졌다

요즈음에는 닭들이 모이를 쪼는 이런 풍경도 보기가 힘들어졌다 ⓒ 이종찬

"푸다닥~ 푸다닥! 꼭꼬오~꼭꼬~ 푸다닥~ 푸다닥! 꼭꼬오~꼭꼬~"
"꼭꼬꼬꼬~ 꼭꼬꼬꼬~"
"어험~"

나는 지금도 길을 지나다가 장닭 한 마리가 여러 마리의 암탉들을 데리고 꼬꼬거리며 모이를 쪼아 먹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되면 어릴 적 우리집에서 키운 닭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리고 아주 이른 겨울날 새벽에 들은 그 소리들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간밤 절절 끓던 방이 서서히 식어가는 꼭두새벽. 서로 이불을 마구 끌어당기다가 설핏 잠이 깰 무렵이면 어둠을 쫓아내기라도 하듯이 홰를 치며 울던 장닭의 맑은 울음소리, 마악 잠에서 깬 닭들이 꼬꼬거리는 소리,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장작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뒤섞인다.

"밤새 닭이 또 한마리 없어졌뿟네."
"그 놈의 쪽제비가 어찌나 영리한지, 아무리 철사로(철사를) 가(가지고) 빈틈없이 엮어놔도 희한하게 뚫고 들어간다카이."
"그렇다꼬 밤새도록 지킬 수도 없는 노릇 아인교."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닭을 많이 길렀다. 우리집에서도 싸릿대로 만든 삽짝문 옆에 서너 평쯤 되는 닭장을 만들어 스무 마리 남짓한 닭을 길렀다. 그 중 수탉은 두어 마리만 있었을 뿐 대부분 암탉들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스무 마리 남짓한 병아리가 새롭게 태어났지만 닭의 숫자는 더는 불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무 마리 남짓한 병아리들 중 절반은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그대로 죽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또 용케 살아남아 깃털이 송송 솟아나는 중병아리들도 툭 하면 솔개와 족제비가 잽싸게 낚아챘다. 게다가 어머니께서는 어미닭이 되어도 알을 제대로 잘 낳지 못하는 암탉들과 살이 잘 오른 수탉들은 대부분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스무 마리 남짓 남은 암탉들은 대부분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고, 하루에 반드시 한 개씩 달걀을 낳았다. 그런데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던 암탉들이 언젠가부터 하룻밤만 지나면 한마리씩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도 제일 알을 잘 낳고 살찐 씨암탉만 골라서 말이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황금빛을 띤 족제비가 참 많았다. 언뜻 보면 여우처럼 생긴 그 족제비들은 간혹 낮에도 사람들이 없는 틈을 보아 마당에서 모이를 열심히 쪼아먹고 있는 암탉들을 날쌔게 채 가기도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집 밖으로 나갈 때면 닭들을 지키기 위해 간혹 개를 풀어놓기도 했다.

"그 족제비가 15년쯤 묵었는데 밤마다 몇 마리씩 떼를 지어 댕김시로(다니면서) 닭 한마리씩을 잡아 먹는다는구먼."
"그 족제비들이 아무리 영리하다캐도 꼬리가 길모 잽힐 낀데(잡힐 건데)."

씨암탉들을 날쌔게 채 가는 것은 족제비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형들은 족제비보다 더 빠른 솜씨로 닭들을 채 갔다. 하지만 마을 어르신들은 마을 형들 중 누구누구가 닭서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눈 감아주었다. 그리고 닭이 없어질 때마다 그저 족제비 타령만 했다.


"김산! 인자부터 김산 집에 키우고 있는 그 15년 묵은 족제비보고 조심 좀 하라카소?"
"그기 머슨 말이고?"
"하도 그 족제비가 설치쌓서(설쳐대서) 며칠 전부터 우리집 장닭을 싸움닭으로 훈련시켜 놨거든. 그라이 인자부터 닭서리로 할라꼬 잘못 덤벼들다가는 우리집 장닭한테 혼땜을 할끼라."

a 닭들을 바라보면 어릴 적 고향이 떠오른다

닭들을 바라보면 어릴 적 고향이 떠오른다 ⓒ 이종찬

그랬다. 마을 어르신들은 닭의 숫자가 자꾸 줄어들자 저마다 두어 마리 있는 장닭을 싸움닭으로 훈련시켰다. 그리고 그때부터 암탉 주변에 낯선 사람이 다가가기라도 하면 으레 그 장닭이 날개를 비스듬히 내려뜨린 채 잽싸게 다가와 홰를 치며 마구 쪼아댔다.

"허어! 똥개 몇 마리 키우는 거보다 장닭 한 마리가 더 낫구먼."
"낫고 말고. 특히 저 집 장닭은 낯선 사람만 보모 울매나 무섭기 쪼아대든지 주인 말고는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카이."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나는 달걀을 꺼내기 위해 암탉이 앉아있는 둥지로 향했다. 그리고 한동안 암탉이 알을 낳는 모습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면서 어서 암탉이 알을 낳고 '꼬끼오!' 하고 울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하필 그 장닭이 나를 바라보며 날개를 비스듬이 내리는 것이었다.

그 장닭은 보나마나 주인인 나까지 적으로 간주하고 쪼아대려 다가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설마 주인을 쪼아대겠거니 했다. 그리고 암탉이 '꼬끼오'하고 울자마자 둥지 속에 손을 넣어 따스한 알 서너 개를 꺼내 행여나 깨질새라 조심조심하며 닭장을 빠져나왔다.

"꼭꼬꼭꼬꼬~ 꼭꼬꼭꼬꼬~"
"이 닭이 실성을 했나? 저리 안 비킬끼가!"
"푸다다닥! 꼭꼬꼭꼬꼬~ 푸다다닥! 꼭꼬꼭꼬꼬~"

그때 장닭이 홰를 치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 쥐고 있던 따스한 달걀 서너 개가 그만 땅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더욱 얄미운 것은 그 장닭이 나를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깨진 달걀을 맛나게 쪼아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자리에서 그 장닭을 발로 냅다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장닭이 저만치 짚단처럼 날아가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꼬꾸라진 장닭은 일어서지 못하고 다리만 발발발 떨고 있었다. '너무 세게 찼나?' 하면서 나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그 장닭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장닭은 동그란 눈만 자꾸 끔뻑이며 일어서지 못했다. 정말 큰일이었다. 그렇찮아도 어머님께서는 우리집 닭들이 하루에 몇 개씩 달걀을 낳는지를 손바닥 보듯이 환하게 알고 계셨다. 그런데 그 귀한 달걀을 깨뜨린 것도 모자라 이젠 장닭까지 죽게 생겼으니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 놈의 장닭이 오늘 낼로(나를) 지길라(죽일려) 카나? 와 이래쌓노? 낼로 쪼아도 좋은께네 퍼뜩 좀 일어나 보거라. 으잉?"

"니 그기서 뭐하노?"
"장닭이 쪼매 아푼 거 같심니더."

그때 아버님께서 초가지붕만한 나뭇짐을 한짐 진 채 집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달걀이 깨진 자국과 동그란 눈을 말똥거리며 일어서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장닭을 번갈아 쳐다보셨다.

"고마 놔 두뿌라. 그렇찮아도 오늘 그 장닭을 잡을라 캤더마는, 지도 지 죽을 날로 알고 그라는 갑다."
"와 잡을라 카는 데예?"
"너거 외할배가 요새 몸이 좀 안 좋다 아이가. 그라고 그 장닭 그기 툭 하모 자꾸 달걀로 건드려쌓서 도저히 안 되것다."

그랬다. 나는 지금도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닭들을 바라보면 그때 그 일이 슬며시 떠오른다. 그리고 삶은 달걀을 소금에 찍어 볼이 미어터지도록 먹고 싶다. 또 내 발길에 맞아 미처 일어서지도 못한 채 그대로 목이 비틀린 그 장닭의 동그란 눈동자가 자꾸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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