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어도 준치, 물러도 준치'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48]어릴 적 먹던 준치를 목포에서 먹다

등록 2004.02.09 10:57수정 2004.02.0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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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이 많은 준치
비늘이 많은 준치김규환
제사상에 언제나 올려졌던 '준치'는 갈치, 멸치, 꽁치처럼 '치'자 돌림이다. 그런데 그 맛은 끝내준다고 했다. '썩어도 준치'라 했지 않았던가. 제사에 고춧가루가 올라가지 않듯 하찮고 비린내 나는 '치'자류의 생선은 상에 오르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꽤 많은 어른들은 이 맛있는 걸 빠트리지 않고 제사상에 꼭 올리고자 갖은 애를 썼던 모양이다. '병치'가 '병어'로 바뀌어 상에 오르듯 '준치'도 '준어'로 불러 조상을 극진히 모셨다.

어릴 적 나는 제사와 차례를 지내고 나서 상어와 준치를 먹어본 적이 있다. 상어는 홍어나 고래고기처럼 삭힌 듯 시큼한 맛이 오래 맴돌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고 준치는 전어(錢魚) 못지 않게 뼈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가시가 어찌나 많던지 처음엔 한두 번 먹어보다가 말았다. 그렇다고 거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다. 아버지 입맛을 그대로 빼닮은 나는 이듬해 설에 두 번 째로 준치를 먹게 되었다. 용기를 내서 젓가락으로 한 덩어리를 툭 찢어 뼈와 살이 각각 반씩인 찜을 '볼딱지' 가득 넣고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잔 가시도 무척 많은 준치
잔 가시도 무척 많은 준치김규환
뼈째 먹는 고기는 살만 있는 고기보다 씹을수록 고소함이 더해져 자꾸 손을 움직이게 하는 매력을 가졌다. 전어와 준치를 먹은 뒤론 그 맛있던 굴비도 예전 같지 않았다. 몇 번 맛보지 않았지만 쉬 그 '꼬스름하고' 쫄깃하며 부드러운 맛에 빠졌다.

그날도 준치를 먹은 뒤 이(齒) 사이에 얇고 기다란 가시가 몇 개 낀 줄 알았지만 아랑곳 않고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 사이에 낀 건 몇 개 되든지 탱자나무가시든 대나무 가지로 빼내든지 칫솔질을 하면 문제가 아니었다.


손가락이 닿지 않는 목구멍에 기다란 가시가 걸린 듯 박힌 듯 고역의 시작이었다. 잡힐 듯 잡힐 듯 손엔 잡히지 않는다. 몸이 달아올랐다. 급해졌다. 침 삼키는 걸 방해하고 헛기침마저 내뱉게 만드는 심각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캑캑"
"밥 묵다 말고 왜 근다냐?"
"음니, 모구녀에 까시 얼려쓰. 어어어 족같소?(목꾸녕에 까시 걸렸소. 어짜면 좋겄소?)"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지라 손짓을 해가며 대충 얼버무렸다.

"암시랑도 않응께 역실로(일부러) 뱉을라고 하지 말고 그냥 고대로 있그라와."
"끄덕끄덕 잉~"

"캐액!"

준치는 4~50센티 정도 되는데 큰 것일수록 맛있답니다.
준치는 4~50센티 정도 되는데 큰 것일수록 맛있답니다.김규환
어머니는 진지를 드시다 말고 항아리에 가서 긴 배추 가닥김치 두 개를 떼어 오셨다. 짧은 시간이 흘렀건만 가시는 식도를 간질이며 목구멍을 콕콕 쑤셔댔다.

"아야 거시가, 밥 한 숟구락 몽창 떠 짐치(김치의 사투리로 '짐채' 또는 '딤채'의 변형인 듯 함)에 싸서 한꾼에(한꺼번에) 생켜부러라(삼켜라)"
"음음…. 꿀꺽!"

평소 먹던 양의 세 배나 되게 양껏 떠서 삼키고 나니 가뿐하다. "휴" 눈물 한번 찔끔 쏟아낸 뒤였다. 그렇게 멋모르고 먹었던 가시고기 준치. 아직도 우린 명절 때 빠트리지 않고 준치, 준어를 상에 올린다.

김규환
며칠 전이다. 모 방송에 고정출연을 기념하여 담당 프로듀서와 리포터 등 제작진과 전남북에 취재 겸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늘 목포에 가면 빠트리지 않고 먹는 게 홍어와 자르지 않은 세발낙지인데 그날도 싱싱한 흑산 홍어 애(홍어 간)를 꺼내 먹었다.

그러고서 목포의 명물인 인동주(인동초로 담근 술)로 입가심하고 해장으로 메생이국(해초의 일종으로 파래와 감태와 비슷하지만 너무 가늘어서 젓가락으로 떠먹기가 힘든 겨울철 별미)을 먹으면 환상적인 맛의 깨달음을 경험했다.

전어회는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카페 회원들과 같이 갔을 때 이미 먹어봐서 그 맛을 알기에 뭔가 특별한 게 없을까 요리조리 궁리를 하고 있던 터에 길 안내를 맡았던 분이 "다른 것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응께 오늘은 준치회나 한번 먹어봅시다"하며 자신의 식구들 대하듯한다.

'그래 내가 바라던 바야. 오늘은 내 입맛에 딱이겠구먼….'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채소와 회를 넣고 버무리기 직전 입니다. 역시 손으로 살살 주물러 줘야 맛이 나지요.
채소와 회를 넣고 버무리기 직전 입니다. 역시 손으로 살살 주물러 줘야 맛이 나지요.김규환
허름한 횟집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모르는 곳에서 식당을 찾을 때는 언제나 적당히 허름할 것, 유리창이 최소 3년은 지나 음식물 때가 끼어 있을 것, 식당 아주머니도 촌티가 자르르 흐르고 음식물 담은 접시나 그릇도 닳아 교체 직전에 있어야 성큼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 집이라야 주인장이 양을 재지 않고도 재료를 대충 숭숭 썰어 손으로 "쭈물딱 쭈물딱" 주물러 주면 특유의 시골음식 솜씨를 맛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여전히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은 그 집도 그런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 앉자마자 준치를 찾았다. 서울서 온 손님이라고 남자 주인은 우리에게 준치를 담아 앞에 내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입맛 땡기지 않습니까? 같은 값이면 바닷가에서 그것도 남도에서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이번 주말 계획 잘 잡으시기 바랍니다. 벌써 남녘은 봄이더이다.
입맛 땡기지 않습니까? 같은 값이면 바닷가에서 그것도 남도에서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이번 주말 계획 잘 잡으시기 바랍니다. 벌써 남녘은 봄이더이다.김규환
"깊지 않은 민물과 바닷물이 닿는 연안에서 나는 준치는 잡자마자 바로 냉장에 들어갑니다. 회는 활어(活魚)보다 선어(鮮魚)가 맛있는데 냉장해서 보관하면 그 맛 그대로 오래 보존할 수 있어요. 포를 떠 이 놈의 가시를 밤에 보면 모두 은은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야광(夜光) 빛을 띱니다. 뼈가 많지만 드셔보시면 아시겠지만 고소하기 이를 데 없지요. 또한 단백질 함량이 생선 중에서는 가장 많아 오래 전부터 사랑을 받아온 생선입니다."

조리하지 않은 준치를 요모조모 이야기를 들어가며 구경을 실컷 했다. 일행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 부엌으로 쳐들어갔다. 한쪽에서는 은빛 찬란한 국산 갈치조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사이 포를 떠서 준비된 재료-오이, 양파, 미나리, 참깨에 갖은 양념을 하고 집에서 담근 매콤하고 달달한 고추장을 치고 '조물조물' 무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식도락가 체질인 터라 주방까지 점령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겠다 싶어 비결을 훔쳐보았다.

바닥에 참기름과 참깨가 깔려서 대접이 나오면 밥을 모두 넣고 회 무침을 올려 비벼 주세요.
바닥에 참기름과 참깨가 깔려서 대접이 나오면 밥을 모두 넣고 회 무침을 올려 비벼 주세요.김규환
곧 방으로 들어와 기다리니 새빨간 준치회무침이 들어왔다. 반찬이 차려지고 뜨끈한 밥이 나온다. 대접에 밥을 뒤집어 담고 회무침을 듬뿍 올려 숟가락으로 둘둘 비비니 비빔밥 완성.

기대되는 순간이다. 세상 물정을 조금 알고서 다시 먹어보는 준치, 오늘은 찜도 아닌 회로 준치와의 새로운 만남이니 비비는 동안에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한 술 듬뿍 떠서 씹어봤다. 먼저 시큼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더니 이어 달콤한 고추장이 감고 돌았다. 풋풋한 채소 향에 참깨의 고소함도 잠시였다. 혀에 가시가 살며시 다가와 가시가 있음을 알린다. 어금니로 옮겨 몇 번 잘근잘근 씹어댔더니 참깨의 고소함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꼬스름한' 맛이 오랜 여행 후 지친 내 허기를 깨우고 머리를 맑게 한다.

준치회무침. 그냥 무침으로 먹어도 그만이지만 밥에 비벼서 먹어보지 않고서는 감히 그 맛을 논하지 말라. 물컹거리지도 않은 단단하고 쫄깃함에 소리 없이 부서지는 그 잔 가시의 오묘한 조화. 그 맛에 '썩어도 준치', '물러도 준치, 썩어도 생치'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만일 용왕님이 뭇 물고기를 불러모아 하나씩 빼서 준치에게 이 잔 가시를 넣지 않았던들 흐물흐물하고 볼품없는 일반 청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야흐로 봄이니 남도에 가거든 색다른 회 한번 먹는 것도 세상사는 재미 아닐까.

언제고 다시 고향에 내려가 살면 썩은 준치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다. 삭힌 홍어 그리 먹었던 내가 썩은 준치 하나 못 먹을까?

준치회 비빔밥 또는 회덮밥. 끝내주게 맛있습니다.
준치회 비빔밥 또는 회덮밥. 끝내주게 맛있습니다.김규환

덧붙이는 글 | 목포에 가면 웬만한 곳이면 준치와 병어회 무침을 만날 수 있습니다. 1인분에 7000원 꼴이니 값도 적당합니다. 봄철에 맛있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목포에 가면 웬만한 곳이면 준치와 병어회 무침을 만날 수 있습니다. 1인분에 7000원 꼴이니 값도 적당합니다. 봄철에 맛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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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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