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50

등록 2004.02.27 11:23수정 2004.02.2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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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점점 깊어가는 데도 에인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제후의 이야기가 모래바람처럼 자꾸만 귓전을 때린 때문이었다.


'그는 영토만이 아니라 아버지까지 잃었다….'

그 생각만이 번갈아가며 갈마들었다. 에인은 그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이 밤에 몸을 일으킨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음에도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제후의 아버지는 적들에게 참수까지 당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지휘 검을 잡았다. '지금 그런 생각에 들떠봐야 아무 해결점이 없다, 때가 될 때까지 참아라, 참아야 한다'라고 지휘검이 자신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지휘 검은 아무 것도 들려주지 않았다. 자신을 달래주지도, 그렇다고 귓전에 감겨있는 제후의 사연을 멀리로 쫓아주지도 않았다.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 책임선인이 자고 있었다. 그는 선인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시오. 어서 가서 강 장수, 은 장수를 모셔오시오."


책임선인은 몸을 일으키는 즉시 금괴상자와 에인의 함부터 살폈다. 그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었다. 한데 무슨 일로 지휘봉까지 꼭 쥐고 장수들을 찾고 있는가. 대월씨 국을 떠난 뒤부터 늘 장군과 함께 잠자리를 해왔으나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제후도 함께 모셔오시오."
에인이 다그쳤다. 책임선인은 비로소 벌떡 일어나 장수와 제후의 천막으로 내달려갔다.
잠시 후 호출한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섰고 장수 둘은 중무장까지 하고 왔다. 전에 없던 일이라 그들도 긴장을 한 것이었다. 에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잠들 깨워서 미안하오."
"별 말씀을요. 한데 무슨 일이옵니까?"
"먼저 제후님께 물어보겠습니다. 딜문의 주민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2천명쯤 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이 죽고 또 뿔뿔이 흩어져서…."
"남은 주민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습니까?"
"한군데 모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주에 연락거처가 있습니다."
"누주라면 여기서 그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약 4백리쯤 떨어져 있습니다."
"그럼 딜문까지는 어떻습니까?"
"7백리쯤 됩니다."

"그럼 우리가 딜문을 친다면 그 전에 누주부터 들려야합니까?"
"글쎄요, 그건…. 한데 왜 갑자기 이러시는지 그 까닭부터 알고 싶군요. 이런 이야기라면 내일 하셔도 될 텐데 말입니다."

그 말엔 장수들도 동감이라는 듯 일제히 에인을 주시하며 그 대답을 기다렸다.

"딜문을 정탐해보고 싶어서입니다."
"정탐이야 당연한 수순이지요."
"지금 당장 말입니다."
에인의 그 말엔 모두 놀란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인이 계속했다.

"정벌은 야간에 할 것입니다. 기습이지요. 그러자면 그곳의 밤 풍경을 미리 익혀둬야 치밀한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강 장수가 되물었다. 그는 에인의 전략을 정확히 알고 싶었다. 야간에 기습전까지 생각했다면 그새 혼자서 모색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건 강 장수도 바라던 일이었으나 그럼에도 한판 전쟁을 치른 다음에야 익숙해질 줄 알았다. 한데 야밤에 느닷없이 참모진을 소집할 정도라면 그 구상도 나름으로 탄탄하다는 증거다. 에인이 자기 복안을 털어놓았다.

"제후님과 강 장수, 그리고 나는 지금 출발하고, 은 장수는 내일 아침 여기 군사를 이끌고 누주로 오는 것이오. 그럼 우린 정탐을 끝내고 누주로 가서 함께 조우해 그날 밤이든지 다음 날 밤에 야습을 하는 것이오."

제후가 나섰다.
"생각은 좋지만 누주는 여기서 직선거리이고 딜문은 북향입니다. 군사와 우리가 따로 행동하기엔 좋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내 생각에는 모두 먼저 누주에 가서 그간의 사정을 파악하고 그리고 딜문을 탐색해본 다음에 치고 들어갈 방도를 찾음이 좋을 듯합니다."

그때 강 장수가 나섰다.
"누주를 들려서 딜문으로 향한다면 거리가 멀어 시간 낭비도 클뿐더러 군사를 이끌고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사이 소문이 번질 수도 있습니다."

에인은 강장수의 말을 듣고 빠르게 정황판단을 했다. 누주를 들릴 것 없이 맞바로 딜문을 치고 드는 게 여러모로 유리한 일이다. 에인이 말했다.

"강 장수 말씀이 옳습니다. 딜문을 곧바로 치자면 정탐시간은 역시 오늘밖에 없습니다. 자, 그럼 지금 곧 출발합시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제후는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딜문까지는 낙타를 타고 가도 이틀은 더 가야 한다. 그런데 당장 출발해서 그것도 오늘 밤 내로 정탐까지 한다고? 이건 벼락에 콩을 구워 먹자는 것보다 더 심하다.

"장군님,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제후가 만류해보았다. 그는 에인이 별안간 모험심이 발동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여태 놀이삼아 걸어오다가 갑자기 이렇게 재촉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자기 땅을 찾는 중대차한 일에 모험심으로 대응하려 들다니…. 신중을 기해도 결과를 알 수 없는데 장수들까지 풋내기의 모험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니…. 그는 그 고삐라도 늦춰보려고 다시 한번 간원했다.

"정말이지 이 시간엔 출발해봐야 시간낭비만 합니다."
"아직 밤이 깊지는 않았소이다. 정 불안하면 책임선인, 가서 천체선인한테 시간을 물어오시오."
"시간은 저도 좀 볼 줄 압니다만 지금은 해시 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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