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51

등록 2004.03.02 09:56수정 2004.03.0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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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그땐 아직 10시 전이었다. 날이 어둡자마자 잠자리에 들었으니 지금이 한밤중인줄 알았을 것이다. 에인이 다시 제후에게 말했다.

"이미 내 마음이 결정한 일입니다. 그러니 제후께서는 은 장수에게 군사들을 이끌고 올 길이나 일러주십시오."
"하루만큼 올 수 있는 곳과 사람들 왕래가 적은 곳이라야 할 것입니다."


강 장수가 덧붙였다. 제후는 이미 그 누구도 에인을 주저앉힐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장수들처럼 꼭두각시가 되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나? 그가 자신을 어느 방향에 앉혀야 할지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책임선인이 나섰다.

"잠깐, 지금 출발하신다면 은 장수도 함께 따라가셔서 직접 길을 알아오는 게 좋지 않을까요?"
책임선인은 사실 자기가 따라가서 몇 백리라도 길을 답사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았으나 에인이 짐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그렇게 제안한 것이었다.

"좋은 생각이오. 말 달려간다면 3백리쯤은 따라가도 내일 아침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은 장수도 그렇게 말한 후 일행들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제후도 아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제후는 생각했다. '어설픈 일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만이라도 그래야 한다.'그는 바쁘게 말했다.

"잠깐, 정탐꾼으로 나서자면 변복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여벌옷이 있으니 곧 가져오겠습니다."
제후가 바삐 천막을 들치고 나갔다. 제후가 자리를 비우자 비로소 강 장수가 물어왔다.


"장군님, 그 거리가 7백 여리라는데 정말 해뜨기 전에 당도할 수 있을까요?"
그는 제후 앞에서는 에인이 설령 틀린 말을 한다 해도 무조건 복종하는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자기 나름의 준칙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여태 그 궁금증을 묻지 못한 것이었다. 에인이 대답했다.

"겨울밤은 여기도 길 것이오. 영토가 사방 백 여리라니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대충은 돌아볼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가는 길이 워낙 멀지 않습니까?"
"만약 중도에 해가 뜬다면 그때 가서 다시 의논합시다."


그때 제후가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두 벌이니 강 장수도 갈아입으시오."
에인은 얼른 옷을 갈아입었고 그리고 천막을 나서면서 제후에게 말했다.
"제후께서는 제 말에 함께 타셔야겠습니다."
"그러지요."

그들이 말에 오를 때 책임선인은 강 장수에게 조그만 쌀자루를 올려주었다. 혹시 일이 늦어 허기라도 지면 그때 생쌀이라도 씹으라는 뜻이었다.

천둥이는 역시 영특한 녀석이었다. 길 안내를 위해 제후를 앞에 태웠는데도 순순히 받아들였고 또 장정 두 사람의 무게가 여간 아닐 텐데도 녀석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오히려 강 장수의 말보다도 더 빨리 달려주었다.

에인의 꼬리 건드리기 법에도 정확히 반응해서 팔을 돌려 엄지로 건드리면 그 즉시 몸을 착 내려뜨리고 마치 날아가는 접시처럼 내달렸다. 그것이 가장 빨리 달려야할 때 천리마가 취하는 자세였다.

그들은 쉼 없이 달렸다. 주위에 뭐가 있는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음에도 제후는 고삐를 정확히 조정했고, 말 역시 더운 입김 한번 내뿜지도 않고 그저 달리기만 했다. 바람이 앞에서 올 때는 약간 고개를 튼 채 달렸고 뒤에서 올 때는 그 짧은 꼬리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에인이 아직 그 말에 대해 전부 파악하지 못했고 그래서 미리미리 지시를 주지 않아도 말은 제가 알아서 바람과 어둠을 헤치고 달려 나갔다.

새벽 세시쯤 그들은 작은 자브 강 상류에 도착했다. 거기서 제후가 말을 세웠다.
"말들에게 물을 먹여야 할 것입니다."
일행들은 모두 말에서 내렸다. 말들이 물을 마시러 강으로 내려가자 제후가 더운 입김을 훅훅 불어내며 말했다.

"딜문까지는 3백리쯤 남았습니다. 한데 이제부터는 길이 험합니다. 날이 밝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제후는 이제 자기가 모험에 가담했다는 생각을 잊었다. 그리고 오직 장군의 모험이 적중하기만을 빌었다. 그러면 또 다시 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줄어들고 날짜도 앞당길 수 있었다. 에인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앞으로 3백리쯤 남았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때 은 장수가 제후에게 물어왔다.

"그러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은 장수께서는 너무 멀리까지 따라오셨군요."
"곧 돌아가면 군사들의 행군은 인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부터 일러주십시오."
"우리가 오던 길에 첫 번째로 만난 강이 기억나지요? 그곳이 디얄라 강 상륩니다. 그 강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협곡이 하나 있고 그 협곡 뒤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소이다. 그 안에다 군사들이 진을 친다면 낮이라도 사람들 눈엔 띄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여기 일행도 그쪽으로 오실 것입니까?"
"아마 그럴 것이오."

그때 말들도 물을 마시고 다시 올라왔다. 은장수가 먼저 자기 말에 올랐다. 에인이 물었다.
"길은 잘 찾아가시겠소?"
"말이 날 데리고 왔으니 또 잘 데리고 가겠지요. 허허. 그럼 조심들 하셔서 다녀오십시오."
은 장수와 말이 어둠 속에 묻혀갈 때 남은 일행들도 자기 말에 올랐다. 날이 새기 전에 닿자면 자기들도 서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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