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55

등록 2004.03.11 10:32수정 2004.03.1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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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 근처에 도착한 것은 9시쯤이었다. 좀 이른 시간이었다. 기습은 자정 직전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때까진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모두 그 자리에 앉아서 대기하라."

강 장수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아장들이 차례로 그 말을 받아 군사들에게 전했다.


"제자리에 착석."
"제자리에 착석…."

어둠 속에서 그 조용한 명령이 번차례로 넘어갔고 그 지시에 따라 군사들도 소리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짙은 어둠이 착석 대열 위로 꼭꼭 여며들었다. 앞쪽 에 서 있던 강 장수의 눈에는 이미 그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강 장수는 마음을 놓고 다음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는 소변도 금한다.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를 지켜라!"

부시럭거리던 소리도 일시에 중지되었다. 정적이 또 사방에서 그들을 에워쌌다.

"정탐꾼들 이리오 오라 하시오."


강 장수가 조용히 은장수에게 속삭였다. 정탐꾼들 둘이 소리없이 다가왔다. 선인 들이었다. 강 장수가 옆에 둔 옷을 내밀며 말했다.

"우선 이 옷들을 갈아입으시오."

그 옷은 전날 제후가 그들에게 주었던 이 지방의 의복이었다. 선인들이 옷을 갈아입을 때 에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토성 안에 마을이 있고 그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른다고 했소. 그러니까 강으로 내려가서 거기서부터 침투하시오."


강은 마을 저 아래로, 그들과 반대방향이었다. 설령 정탐꾼들이 발각되는 한이 있더라도 군사들의 대기 지점은 은폐할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에인이 덧붙였다.

"가장 안전한 길은 각자가 토성 끝으로 해서 강으로 내려가는 것이오."
"좀 멀겠군요."
"토성은 마을 주위로만 쌓여 있을 뿐 생각처럼 그리 길지는 않소. 다만 그 끝 지점에서 강쪽으로는 늪도 있다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선인들이 대답하고 막 떠나려고 할 때 강 장수가 다시 한번 다짐을 주었다.

"정황만 파악하면 곧 돌아오시오."

에인은 그들이 어둠 속으로 묻혀가는 것을 보고 장수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갑시다."

장수 둘과 에인도 출발했다. 이틀 전 에인이 마을을 보았던 그 지점을 향해서였다. 거기서 토성까지는 약 반 마장쯤의 거리였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가도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은 장수가 손을 쳐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저만치 공중에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마을의 불빛이 그렇게 뻗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발소리를 죽여 토성 쪽으로 접근했다. 역시 그 지점이었다. 그 큰집 마당에는 여러 개의 횃불이 걸렸고 무슨 일인지 그때까지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에인이 나직이 속삭였다.

"저 건물에서 왼편을 보시오. 약 2백보쯤 떨어진 곳에 곡식창고가 있다고 했소. 우리는 물론 불화살을 조심할 테지만 장수들 군사들에게도 그곳은 손대지 말라 이르시오."
"군사들에게도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뒤이어 에인은 제후에게 들은 대로 양과 가축들의 우리, 공동우물의 위치 등을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장수들은 에인이 지목한 곳에 무슨 접착제라도 붙은 듯 한동안 눈을 떼지 않았고 그럴 때 그들의 입에서 더운 입김이 훅 풍겨 나왔다. 벌써 작전계획이 그들 머릿속으로 빠르게 굴러가면서 긴장을 고조시키는 모양이었다.

"이만 돌아갑시다."

에인이 그렇게 말하고 먼저 등을 돌렸다.
그들이 군사들 쪽으로 다가가자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 장수가 먼저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술렁거림이 뚝 멈췄고 아장이 다가와 설명을 했다.

"코고는 병이 있는 그 군사 말입니다. 장군께서 자리를 비운 얼마 후에 그만 잠이 든 모양입니다."

듣지 않아도 뻔했다. 침묵을 지키라고 했더니 잠이 들었고 그래서 코를 골아댔을 것이다. 그 군사가 코를 골기 시작하면 천막이 들썩일 지경이었다.

"그것 때문에 소란이었나?"
"아닙니다.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계속 코를 골아대는 것입니다. 정말 멧돼지 소리가 따로 없었습니다. 적들조차 정말 멧돼지인가 달려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군사들이 그를 들쳐 업고 저쪽 뒤, 들에다 버리고 오느라 잠깐 소란을 피웠습니다."

"뭐, 뭐라구, 군사를 업어다 버려?"
"들어보십시오. 여기까지 코고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지 않습니까?"
"그럼 그는 업어다 버려지도록 깨지 않았단 말인가?"
"예, 그래서 여태도록 코를 골지 않습니까."

그런 구제불능은 차라리 멀리 떼어놓는 게 잘한 일이라 싶었다.

"지금부터 소변을 볼 군사는 차례로 소리 없이 해결하라 이르라."

그리고 강 장수는 에인 곁에 앉아 정탐꾼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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