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은 아름다움 '산수국'

내게로 다가온 꽃들(28)

등록 2004.03.09 09:40수정 2004.03.0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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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국
산수국김민수
한결같다는 것, 그것은 화석화되고 고정화된다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습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데 그 모든 변화의 순간들마다 그만이 가진 아름다움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야에서 만나는 들꽃들과 나무들을 보노라면 방금 온 길을 돌아보아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잠시 잠깐 다른 곳에 시선을 주는 사이에 수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죠.


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일까요?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몽우리일 수도 있고, 화들짝 피어난 모습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막 새싹을 내거나 꽃눈을 낼 때를 아름답다고 할 것 같습니다.

김민수
하얀 눈이 쌓인 겨울 산을 걷다 보면 뜻하지 않은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엽초는 이파리니까 꽃이라 할 수 없을 것이고, 겨우살이는 열매니 그 역시도 꽃은 아닙니다. 그리고 간혹 보이는 붉게 익은 청미래열매나 덩굴용담의 열매도 예쁘긴 하지만 꽃은 아닌데 엄동설한 그 추위에도 어쩌면 한창 벌들이 찾아올 때보다도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있는 꽃을 보게 됩니다. 그 꽃의 이름은 산수국(山水菊)입니다.

김민수
산과 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꽃을 핀 듯하여 더 아름다운 꽃입니다. 산수국을 바라보노라면 보랏빛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파란색이라고 해야할지 그 기묘한 꽃의 색깔에 반하게 됩니다. 그 수많은 꽃들을 피우는 그 생명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고, 곤충들을 유인하기 위해 멋드지러지게 피어난 헛꽃의 아름다움에 혹하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어느 한가지만 아름다워도 '참 아름답다'고 볼 수 있는 법인데 산수국의 생김 생김은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출중한 꽃이나 천지에 있는 것 중 참으로 아름다운 산(山)과 소중한 물(水)을 담고 있는 동시에 사군자 중의 국(菊)자까지도 얻은 것이겠지요. 아름다움의 백미를 보는 듯합니다.

김민수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여리기만 하던 이파리와 꽃잎들이 점점 억세집니다. 여린 것은 여린 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추위와 싸우며 억세진 이파리와 꽃잎은 마치 육체 노동을 하며 손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인 노동자의 손, 농민의 손 같아서 다시 한번 더 바라보게 되는 꽃입니다.

피어나는 순간부터 늦가을까지 꾸준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수국을 보노라면 그 꽃의 한결같음에 놀라게 됩니다.

김민수
맨 처음 피어났을 때에는 주인공처럼 대우를 받았지만 지천에 다른 꽃들이 가세를 하면서 그 빛이 발하면 조금은 실망할 것도 같은데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그저 자기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산수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길 한번 받아보지 못한 깊은 산중의 아주 작은 꽃이라도 그렇게 살아간답니다. 그러니 들꽃들을 찬찬히 살피다 보면 삶에 대해서 진실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저 같은 속물들도 '착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던 꽃들도 겨울이 되고 눈이 내리고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면서 상록의 나무를 제외한 들판의 모든 푸른 빛은 내년을 기약하고 휴식에 들어갑니다. 산수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산수국의 아름다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푸른 빛을 잃은 지금부터 그의 아름다움은 다시 피어납니다.


김민수
이제 얼마 후면 비썩 마른 산수국 마디에서도 푸른 잎파리가 고개를 내밀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산수국의 헛꽃은 화들짝 피어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헛꽃은 곤충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쩌면 변방의 삶이요, 주변부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 변방의 삶, 주변부의 삶이 없다면 산수국은 그 자잘한 꽃만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만큼 충분한 곤충들을 맞이하지 못할 것입니다. 헛꽃이 있음으로 산수국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소개해 드리는 산수국은 제주의 중산간도로변에서 만난 것들입니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변방이었습니다. 유배지였습니다. 어쩌면 과거에는 버림받은 땅이었습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 같은 이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없어져도 그만인 존재였습니다.

김민수
변방, 주변부…. 이런 단어들은 수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마른 산수국의 헛꽃은 한창 피어 있을 때에는 하늘을 봅니다. 곤충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의 일을 다 마친 순간에는 어떤 형상인지요?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김민수
저는 이것을 이렇게 봅니다. 이제 땅에 씨앗이 떨어졌으니 그 떨어진 씨앗들이 잘 자라는지 어떤지 보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고 말입니다. 아니면 이제 지긋하게 나이도 들고 세상의 풍파를 다 겪고 나니 삶이란 그렇게 꼿꼿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어 고개를 숙인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김민수
봄꽃이 한창 피어나던 3월 초에 한라산에도 큰 눈이 내렸습니다. 겨울 바람에 부시럭거리던 산수국들은 그 칼바람에도 끄떡하지 않고 겨울을 나더니만 이제 막 올라오는 부드러운 싹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하나 둘 누워버립니다.

겨울 칼바람도 잠재우지 못하던 그들에게 휴식을 주는 작은 싹들은 복수초, 새끼노루귀, 변산바람꽃, 달래, 박새의 싹, 개구리발톱 뭐 이런 작은 것들입니다.

피어날 때부터 다시 자기의 고향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결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산수국을 닮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기사까지의 기금] 540,000원

덧붙이는 글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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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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