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58

등록 2004.03.18 16:33수정 2004.03.1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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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수장 집을 주시했다. 벌써 불길에 휩싸여 문짝까지 넘어졌고 그 앞에는 몇 명의 남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일부 기병들과 선인들이 계속해서 그 집을 주시하면서 나오는 사람마다 그렇게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반대편 마을 쪽에서 별안간 더 많은 사람들이 짐승 같은 소리를 질러대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곡식창고 쪽을 돌아보았다. 그쪽에도 아직 교전이 끝난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다시 밀려오는 무리들을 보았다. 그 무리는 급물살처럼 점점 더 가까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는 다급하게 명령했다.


"불화살을 날려라!"
불이 사람들 몸에 올라붙으면 그들도 주춤할 것이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는 그만큼의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다. 선인과 후열 기병들이 숨도 쉬지 않고 불화살을 날려댔다. 그때였다. 그 무리들 뒤쪽에서 은장수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좌군이다! 좌군!"
주민들이 그렇게 몰려온 것은 좌군의 기습에 쫓겼던 때문이었다.
"저기 우군도 옵니다."

우군들은 수많은 포로들까지 대동하고 있었다. 에인은 그만 온 몸의 힘이 주욱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수장이 남아 있었다.

그는 다시 수장의 집을 주시했다. 불길은 점점 거세게 타오르는데 안에서는 더 이상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문득 의심이 찾아들었다. 그새 수장은 다른 문으로 달아났을 수도 있었다. 그는 급히 좌, 우군 대장들을 불렀다.

"이상하오. 여태 수장인 듯한 사람이 나오지 않았소. 불길이 저렇게 타오르는데도 튀어나온 사람들은 저 앞에 쓰러진 저들뿐이오."
강 장수가 말에서 내려 직접 시체들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역시 저 시체들 속엔 수장은 없는 듯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인은 기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장이 도주한 것 같다! 전원 추격하라!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오라!"


기병들이 사방으로 달려 나가자 강 장수는 보병들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 불을 끄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을 끈 뒤 실내를 살펴봐야 확실한 정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보병들 일부는 불을 끄고 또 일부는 포로들을 묶는 일에 동원되었다. 보병들이 어떻게나 많은 물을 갖다 부었는지 수장의 집은 이제 완전히 물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지붕은 내려앉아 꺼먼 뼈다귀처럼 사방에 걸렸고 집 앞으로는 검은 물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물을 나르던 보병들이 다른 집으로 몰려가고, 흘러내리던 물길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 때 그들은 집안 수색을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집은 컸고 뒤로 들어갈수록 방도 여러 개였다. 그 방마다에 여성들이 아이와 함께 고꾸라져 있었다. 질식을 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시체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두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에인은 그만 그곳을 나오고 말았다. 반드시 잡아야 할 사람은 놓치고 죄 없는 여자들과 아이들만 죽인 것이었다. 수장을 제후에게 넘겨주어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던, 그런 계획들이 빗나가서만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했던 정벌이란 정의를 세우는 일이었다. 정의를 망가뜨린 수괴를 제대로 처치하지 않는 한 그 정의는 바로 설 수가 없었다.

그는 집 앞을 서성댔다. 과연 기병들은 수장을 잡아올 것인가. 만약 잡아오지 못하고 놓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후에게는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그는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지휘 검을 끌어 잡았다.

'내가 직접 나서야 한다!'

설령 수장이 달아난 방향을 알지 못한다 해도 지휘 검과 천둥이가 도와줄 것이었다. 그는 사방을 살펴보았다. 마당에는 군사들과 포로들로 시끌벅적한데도 천둥이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휘검을 휙 쳐들어보았다.

수장의 집 뒤쪽에서 천둥이가 달려왔다. 에인이 집 안에 들어갔을 때 가까이 가 있으려고 그쪽으로 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다가드는 녀석의 머리를 안고 그 귀에 속삭였다.

"적장을 놓쳤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말에 뛰어올랐다. 그때였다.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기병들이었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들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일당 모두 잡았습니다!"

적들은 그들이 타고 달아났던 당나귀 등 위에 꽁꽁 묶인 채 끌려오고 있었다. 남자 여섯에 젊은 여자 하나였다. 남자 다섯은 족장의 사병들이었다. 에인이 기병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끌어내리시오."

에인도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끌어내려지는 포로들을 살펴보았다. 여자는 바닥에 내려앉아서도 부들부들 떨었고 그처럼 잔인하다던 수장도 이미 기가 꺾여 후들거리며 막 땅바닥에 주저앉고 있었다.

수장이 끌어내려질 때 저만치서 두릅으로 묶여 있던 이 마을 사람들이 이쪽 포로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좋은 말을 던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머지 사병들도 모두 끌어내려졌을 때 강 장수가 집안을 수색했던 그 결과를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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