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을 세우고 평화의 촛불을 밝히다

[촛불집회 참가기] 우리 가족 네 식구도 나가봤습니다

등록 2004.03.19 08:50수정 2004.03.1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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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아침부터 무딘 부엌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와는 달리 내 손을 빌리지 않고 부지런히 갈아댔지만 잘 갈아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부엌칼을 치켜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부엌으로 들어간 지 3분도 채 안돼서 다시 나왔습니다.


"날이 서질 않네, 안 되겠어. 당신이 갈아줘."
"진작에 그럴 것이지, 부엌칼을 아무나 갈 수 있는 줄 알어?"

나는 짐짓 우쭐거리며 무딘 부엌칼을 받아들었습니다. 부엌칼은 숫돌과 적당히 각을 세워 갈아야 날이 섭니다. 헌데 아내는 각을 너무 세웠거나 아예 칼날을 숫돌과 바싹 붙여서 갈았던 것입니다.

부엌칼은 적당히 날이 서야 좋습니다. 너무 예리하면 손을 베이기 십상입니다. 적당히 날을 세워야 할 칼. 부엌 앞에 쪼그려 앉아 숫돌에 침을 퉤퉤, 뱉어 가며 부엌칼을 썩썩 문질러 날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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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부엌칼로 가장 체면 좀 세우고 이번에는 톱과 낫을 들었습니다. 지난 폭설로 쓰러진 대나무 숲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납작 엎드려 있던 어지간한 대나무들은 눈이 녹으면서 생기를 되찾아 벌떡 벌떡 일어섰지만 밑 부분이 쩍쩍 갈라지고 쪼개진 채로 쓰러진 대나무들은 전혀 일어서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폭설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폭삭 주저앉은 대나무들을 톱으로 베고 낫으로 쳐내 적당한 크기로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오이며 토마토, 고추 버팀목으로 쓰기 위해 닭장 옆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습니다.


작업을 마치고 나니 이번에는 낫이 시원찮아 보였습니다. 대나무를 함부로 쳐대서 그런지 무쇠 낫의 날이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숫돌에 무뎌진 낫을 갈았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숫돌에 칼날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무딘 칼날을 세우는 것은 나태한 자신을 세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듯싶었습니다.

칼을 갈며 내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칼날은 마음과 같았습니다. 너무 날카로우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해를 입힐 것이고 무뎌지면 타인에게 짐을 떠넘겨줄 뿐만 아니라 내 몸조차 녹슬게 할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불의와 위선이 설쳐대는 이 땅에서 날카롭지도 무디지도 않은 중용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칼날은 너무 날카로우면 타인에게도 해를 입히는 법

저녁 6시 30분부터 공주 시내에서 '탄핵반대 민주수호' 집회가 있었습니다. 무딘 날을 세우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식구들과 함께 집회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비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독 안에 든 쥐를 잡으러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자칫하면 독 안에 든 쥐한테 물리기도 합니다만 그래 봤자 독 안에 든 쥐가 아닙니까? 불법집회로 규정지어 놓았다지만 전혀 꺼림직하지도 않았습니다.

"잘 됐다, 겸사겸사 오늘 밖에 나가 외식이나 하자."

시내로 나가는 길에 모처럼만에 외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촛불 켜고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못된 사람들 못된 짓 못하게 촛불 들고 행진한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는데 외식까지 한다니 아이들이 방방 떴습니다.

시내로 나가는 길에 초등학교 3학년생인 큰 아이 인효가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차 물었습니다.

"작년에는 미군들 땜에 촛불 집회했는데 이번에는 왜 하는겨?"
"이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인데, 전혀 우리나라 사람들 같지 않은 사람들 땜에 그러지."
"어떤 사람들인데?"
"우리 집 갑돌이나 돌진이보다도 못한 사람들이지."
"사람이 어떻게 개보다 못해?"
"아무리 먹을 것이 많아도, 더 많이 먹겠다고 닥치는 대로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아주 못된 사람들을 개보다 못하다고 말하기도 하는 겨."

"아까는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을 자기들 맘대로 쫓아 내려는 사람들이라며…."
"그 사람들이 대통령을 쫓아 내려 하는 것은 더 많이 먹으려고 그러는 거나 마찬가지여. 우리 집 갑돌이나 돌진이는 서로가 먹이를 빼앗아 먹겠다고 싸우지는 않잖아. 배부르면 가만히 있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배 터지도록 먹고도 다른 사람들이 먹고 있는 것까지 빼앗아 먹겠다고 그러니까 우리 집 개들보다 못한 거지."
"왜 그러는데?"
"아빠도 그게 궁금혀. 그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a 3월 18일 공주에서도 탄핵반대 민주수호 촛불집회가 있었습니다.

3월 18일 공주에서도 탄핵반대 민주수호 촛불집회가 있었습니다. ⓒ 송성영

칼국수로 외식을 하고 집회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은 7시. 집회장은 한창 축제 열기로 들떠 있었는데 홍보가 덜된 탓이었는지 생각보다 모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다들 오는 3월 20일 토요일 집회를 벼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꽃샘 추위로 밤 공기가 제법 쌀쌀했는데 촛불과 함께 사람들의 열기가 추위를 녹여 주었습니다. 집회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분노로 들끓었던 미군 장갑차 사건 때보다는 한결 밝아 보였습니다. 여유조차 있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이란과 시합을 벌이던 날 저녁 8시쯤, 대전에서 밥벌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이었습니다.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라디오 토론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탄핵 집회를 반대하는 어떤 사람이 "촛불은 사람을 흥분시키는데 왜 하필이면 촛불을 들고 흥분을 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촛불 때문이 흥분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지만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그런 흥분된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촛불 때문에 흥분하여 구호를 외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봤는데 눈빛이 촛불을 향하고 있을 때는 오히려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었습니다. 경건한 모습들이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우리 집 아이들조차 촛불 앞에서만큼은 경건해 보였습니다.

우리 네식구도 촛불을 집어들었습니다. 하나의 하나의 촛불은 큰 힘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약하게 흐느적거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촛불들과 어울려 큰 힘이 되었고 또한 그 힘은 평화로움으로 넘실거렸습니다.

촛불집회를 분풀이성 집회나 사회 혼란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평화로운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다수의 폭력이 탄핵 정국을 주도했듯이 그들의 속성은 대체로 폭력적이라고 봅니다. 때문에 그들은 분명 평화로운 촛불집회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폭력을 먹고 살찌워 왔으니까요.

홍사덕이라는 국회의원이 그랬다고 합니다.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오정'이나 '이태백'이라고요. 하지만 집회 현장에는 그가 말하는 '사오정'이나 '이태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집회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생업인 빵가게조차 닫고 참여한 부부를 비롯해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 주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학생들이나 주부, 어린아이들을 직장도 없는 '이태백'이라고 한다면 뭐, 할말은 없습니다.

적어도 내가 참여한 집회에는 직업이 없어서 할 일이 없이 빈둥빈둥 노는 게 지겨워 집회에 나온 사람들도 없었지만 집회를 통해 어떤 이익을 챙기겠다고 나온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생업을 잠시 접어 두고 집회에 나온 사람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은 촛불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피워 올렸습니다.

a 촛불집회에 나선 우리집 인효와 인상이. 촛불은 중용의 마음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촛불집회에 나선 우리집 인효와 인상이. 촛불은 중용의 마음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 송성영

나는 집회를 마치면서 오랫동안 촛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갈았던 칼날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날카로운 칼날과 무뎌진 칼날의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습니다. 촛불은 분명 날카롭거나 무디지 않습니다. 중용의 마음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촛불을 밝히지만 어둠에 익숙한 무리들은 촛불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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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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