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비바람도 꺾지 못하는 '산자고'

내게로 다가온 꽃들(34)

등록 2004.03.22 08:12수정 2004.03.22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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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고
산자고김민수
산자고(山慈姑)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이며 까치무릇이라고도 합니다. 이파리와 뿌리의 모양이 무릇과 비슷합니다. 열매를 맺은 뒤 이파리는 말라 버리고 여름철에는 땅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다가 이듬해 봄이면 따스한 양지에서부터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작은 꽃입니다.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길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과수 농사를 하시는 분들에게는 큰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어렸을 적 아침에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올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아카시아 나무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있는 까치가 아침에 울면 마냥 좋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김민수
요즘은 초고속 인터넷 시대라서 이메일로 신속하게 편지가 배달됩니다만 제가 청소년기를 보낼 때에만 해도 펜으로 쓰는 편지는 사랑을 전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소녀에게 편지를 보내 놓고는 답장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그렇게 답장을 기다리는 어느 날 아침에 까치가 울면 '오늘은 답장이 오겠지'하며 철문에 달려 있는 우체통을 몇 번이고 바라보곤 하던 어느 날의 추억이 수채화처럼 떠오릅니다.

조금은 답답하고 느렸지만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인터넷 시대의 메일도 펜으로 쓰는 편지가 감당하지 못하던 것들을 전하는 좋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한 때 연애 편지를 쓰거나 대필하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세대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이요, 향수같은 것이겠지요.

김민수
지난 해 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영실을 통해 한라산 윗세오름에 올라서 딱 한송이 외롭게 피어 있는 산자고를 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딱 한송이 피어 있는 산자고를 보고는 굉장히 귀한 꽃이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인지 햇살 따스한 들판 여기저기에 줄 지어 피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작은 꽃 몽우리들을 송글송글 맺고 있는 듯하더니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니 너도나도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김민수
산자고를 담기 위해 햇살 바른 양지에 엎드리니 그 작은 꽃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아무리 조심스레 발을 옮겨도 어느새 포악한 인간의 발자국에 짓밟힌 산자고가 있으니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죽지 않고 더 강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아, 너희는 봄을 이렇게 노래하는구나!
가녀린 줄기에
고난의 자색과 순결의 흰색을 담았구나!
봄은 고난의 계절 그리고 부활의 계절
기나긴 고난의 겨울을 이기고
새 봄으로 부활하는 계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있는 계절
그러나
죽음을 죽인 부활이 있는 계절에
그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담아 이렇게 피어났구나!
지금,
보랏빛 고난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시대로
그 연약한 줄기로
그러나 어떤 바람도 끊어내지 못할 함성으로
그렇게 피어나는 구나
짓밟히고 또 짓밟혀도


<자작시/ 산자고>


김민수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예쁘게 보기 시작하면 한없이 예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그 안에 온 우주의 질서가 다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작은 산자고가 봄 햇살을 전부 담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 햇살, 산자고가 다 소유한 것 같은 햇살은 삼라만상 모두에게도 골고루 비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소유,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면 '존재하는 삶'이 되겠죠. 소유한 듯 존재하는 삶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김민수
우리는 늘 소유하려고만 합니다. 소유하려고만 하면 존재할 수 없고, 소유하려고만 하면 결국 소유한 것조차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놓아버림으로써 영원히 소유하는 것, 그것이 존재함이겠지요. 산자고는 3월 중순의 따스한 봄날 어느 바닷가 양지 바른 동산에서 만났습니다. 마치 작은 꽃들이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지천에 흐드러져서 온 들판을 양지꽃과 더불어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꽃들이 모이고 모이니 거대한 꽃물결을 만듭니다. 3월 20일, 우리의 역사가 제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방방곡곡에서 밝혀진 촛불들을 보았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그 주위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하는 가스펠 송이 입가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래요. 우리 한 사람은 저 산자고의 가녀린 줄기처럼 약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센 비바람도 그 연약한 줄기를 꺾지 못합니다. 짓밟히고 뽑혀 나가도 그 곳, 그 자리에서 때가 되면 반드시 또 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촛불을 밝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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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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