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그림에선 송진내음이 난다

소나무만 그려온 서양화가 김경인의 <김경인전>

등록 2004.03.22 21:23수정 2004.03.2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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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경인 화백의 자화상

김경인 화백의 자화상 ⓒ 학고재

조국이라는 이름의 나무 한 그루를
늘 가슴에 심어 두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인 안도현은 <소나무>란 제목으로 이렇게 노래한다. 소나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 겨레는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태어나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 솔가지를 매단 금줄을 쳤으며, 소나무 장작불로 밥을 해 먹었고, 아궁이에 불을 때서 잠을 잤다. 가구를 만들고, 송편을 해 먹었으며, 솔잎주와 송화주(松花酒: 송화를 줄기채로 넣고 빚은 술), 송순주(松筍酒: 소나무의 새순을 넣고 빚은 술)를 빚었다. 송화가루로 다식(茶食: 차를 마실 때 먹는 한과)을 만들어 먹고,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笭)은 약제로 쓰이며, 송이버섯은 좋은 음식 재료이다.

또 소나무 뿌리로 송근유(松根油)라는 기름을 만들어 불을 밝혔고,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인 송연(松烟)으로 먹(墨)을 만들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송진이 뭉친 호박으로 마고자 단추를 해 달았고, 흔들리는 소나무의 운치 있는 맑은 소리를 즐겼으며, 소나무 그림 병풍을 펼쳐 두고 즐겼다. 그리고 죽을 때는 소나무로 짠 관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나무에게 신세를 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a "신목(神木)의 세월(歲月)" /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 259.1×387.8cm

"신목(神木)의 세월(歲月)" /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 259.1×387.8cm ⓒ 학고재

이런 소나무에 푹 빠져 사는 이가 있다. '소나무 작가'로 잘 알려진 김경인(인하대 미술학부 교수)씨가 새로운 소나무 그림으로 오는 30일까지 관훈동 학고재에서 개인 작품전을 연다.

그는 예전 유신 체제의 험악한 사회를 살면서 '문맹자' 시리즈로 소리없는 외침을 해 왔다. 요즘도 친일 예술가들이 도마 위에 오르지만 그는 그림을 통해 사회를 껴안았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솔낭구'이다. 그는 굳이 '솔낭구'라고 한다. 이 얼마나 토속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가?

a 김경인전을 감상하는 사람들

김경인전을 감상하는 사람들 ⓒ 김영조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그의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의 소나무를 바라보노라면 우리의 팔에서 솔잎이 나고, 우리의 손가락에 솔방울이 맺히며, 우리의 살갗에 솔비늘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그림이 하나의 거울인 것은 이처럼 그의 소나무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생히 비춰 주기 때문이다."

a 그림을 설명하는 김경인 화백

그림을 설명하는 김경인 화백 ⓒ 김영조

김경인은 말한다.


"소나무 있는 곳을 찾아 전국을 세차례나 돌았습니다. 제 그림에서 소나무는 단순한 그림의 소재가 아닌 우리 자신, 바로 우리 겨레입니다. 소나무에는 우리 겨레 고유의 춤사위가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전에는 제 그림에 소나무만 있었지만 지금은 '더불어 사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자연을 함부로 다루는 개발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만이 스스로 파멸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학고재 지하 1, 2층에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본다. 서양화는 잘 모르지만 무언가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소나무엔 귀신이 있어요. 소나무에 빠지다 보면 소나무에게 잡아 먹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은 그저 소나무를 설명하는 것에 그쳐버리고 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림이 차츰 추상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정말 소나무 귀신이 있나? 그림을 보면서 무섭기도 하고, 무언가 춤사위가 생각나기도 하고, 무언가 꿈속에 있는 듯도 하다. 소나무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인가?

a "율(律) 03-2" / 캔버스에 유채 / 227.3×181.8cm

"율(律) 03-2" / 캔버스에 유채 / 227.3×181.8cm ⓒ 학고재

그림 속의 소나무들은 바로 우리 겨레 고유의 춤사위를 떠올리게 한다. <돌산 앞 솔낭구>에서는 흥겨운 풍물굿의 빠르고 힘찬 흥취를 쏟아내고, <회목마을송>에서는 시골 할머니들의 해학적인 어깨춤이, <나정노송>에서는 한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승무의 선이 떠오르며 살아온다. 그가 그린 소나무는 단순한 소나무가 아니라 이 겨레의 숨소리가 느껴지는 기운이고, 이 땅 사람들의 철학이다.

그의 그림엔 외송이 별로 없다. 두그루 이상의 솔낭구들이 어울려 있다. 그 까닭을 묻는다.

"외솔은 홀로 있습니다. 그 홀로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더불어 소나무끼리 있어야 멋이 나고, 외롭지 않으며 우리 겨레의 철학이 제대로 살아납니다."

그는 목에 탈 목걸이를 걸고 있다. 그만큼 그에게선 토속이 묻어난다. 말에도 꾸밈이 없다. 그저 소탈하게 표현할 뿐이다. 특별히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느냐고 묻는데 열손가락이 모두 아프단다. 18년간 소나무 그림만 그렸다는 그에게선 송진 내음이 나는 듯하다. 서양화라는 도구는 서양 것이지만 그는 서양 것으로 우리의 철학, 우리의 문화를 쏟아낸다.

우리 오랜만에 인사동으로 나가 학고재화랑에서 '솔낭구'를 만나자. 그리고 우리 겨레의 향기를 한껏 맡아 보자.(02)739-4937

a 춤사위 0402 / 캔버스에 유채 / 90.9×218.1cm

춤사위 0402 / 캔버스에 유채 / 90.9×218.1cm ⓒ 학고재


a 돌산앞 솔낭구 / 캔버스에 유채 / 130.3×162.2cm

돌산앞 솔낭구 / 캔버스에 유채 / 130.3×162.2cm ⓒ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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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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