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꽃을 볼 때마다 내 생각도 쪼매 해라"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48> 개나리꽃

등록 2004.04.06 13:19수정 2004.04.06 15:2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개나리꽃을 바라보면 어린날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

개나리꽃을 바라보면 어린날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 ⓒ 이종찬

"아나!"
"이기 뭐꼬? 칡넝쿨 아이가."
"문디 머스마야. 그기 니 눈에는 칡넝쿨로 비나(보이나)."
"그라모 이기 뭐꼬?"
"우리 집 장독대 옆에 자라는 개나리 가지 아이가. 그라이 니도 퍼뜩 가서 너거 집 장독대 옆에 숭구라(심어라)."
"와?"
"그래야 올 봄에는 니캉 내캉 같은 시간에 노오란 개나리꽃이 피는 거로 볼 수 있을 꺼 아이가."



내 나이 열세 살 무렵의 봄이었지, 아마. 탱자나무 울타리가 빼곡히 둘러쳐진 그 집에 살았던 그 가시나가 내게 칡넝쿨처럼 생긴 개나리의 깡마른 가지를 건네줬을 그때가. 그래. 그때 그 가시나가 건네준 개나리 가지에서는 그 가시나의 얼굴에 하나 둘씩 돋아나는 여드름 같이 제법 볼록한 꽃눈이 송송 돋아나고 있었어.

그날, 나는 고무줄 뛰기를 아주 잘하는 그 가시나가 건네준 개나리 가지를 내 손 두 뼘만한 크기로 잘랐지. 아버지께서 시퍼렇게 잘 갈아놓은 조선낫으로 개나리의 꽃눈을 다치지 않게 아주 조심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그 가시나의 말처럼 우리집 장독대 옆에 일정한 간격으로 심은 뒤 물을 흠뻑 주었어.

그때부터 나는 이른 아침 세수를 할 때마다 그 개나리 가지를 살펴보았고, 세수를 한 뒤 세숫대야에 담긴 물을 개나리 가지에 골고루 부어주곤 했어. 또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 개나리 가지부터 살펴보았어. 그리고 개나리 가지가 묻힌 흙더미가 조금이라도 말랐다 싶으면 또다시 물동이에 담긴 물을 흠뻑 부어주었지.

"니, 내가 저번에 준 개나리 그거 우째 됐노? 인자 노오란 꽃망울이 살살 맺히고 있제?"
"…"
"와 말로 못하노. 혹시 잘못 숭군(심은) 거 아이가. 물은 자주 줬나?"
"니 말대로 심심하모 물로(물을) 줏는데(줬는데), 안주까지도(아직까지도) 꽃망울이 맺힐 생각도 안하고 있다 아이가."
"니 그란다꼬 물로 너무 자주 준 거 아이가. 물로 너무 자주 많이 주모 꺾꽂이 한 개나리 뿌리가 생기기도 전에 아예 썩어뿐다(썩어버린다)카이."


a 개나리는 꺾꽂이 하기에 쉬운 꽃이다

개나리는 꺾꽂이 하기에 쉬운 꽃이다 ⓒ 이종찬

그 가시나의 말을 들은 나는 서둘러 우리집으로 달려갔어. 그리고 장독대 옆에 심어둔 그 개나리 가지 하나를 쑤욱 뽑았어. 아니나 다를까. 하얀 실뿌리가 자라고 있어야 할 그 개나리 가지의 밑둥은 이미 거름빛으로 변해 있었어. 다른 개나리 가지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어. 모두 밑둥이 썩어 있었지.


이를 어쩌나? 그 가시나한테는 또 무슨 변명을 어떵게 늘어놓지? 정말 난감했어.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또 그 가시나가 다시 개나리 가지를 준다고 해도 이미 때가 늦었어. 왜냐하면 그 당시 우리들 상식으로는 꽃망울이 맺힌 가지는 꺾꽂이를 할 수 없다고 알고 있었거든.

게다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꺾꽂이를 제대로 할 줄 몰랐어. 그래서 처음 그 개나리 가지를 심었을 때 헛간에 수북히 쌓인 재를 개나리 가지 위에 듬뿍 얹었어. 그리고 그때부터 물만 흠뻑 자주 주었지. 그렇게만 하면 그 가시나의 장독대 옆에 예쁘게 피어난 그 개나리처럼 우리집 장독대 옆에서도 노오란 개나리꽃이 주렁주렁 매달릴 줄로만 알았거든.
하지만 그게 실수였어. 물을 너무 자주 흠뻑 준 게 탈이었어. 또 막 꺾꽂이를 한 개나리 가지에 재를 듬뿍 얹은 게 더 큰 탈이었어. 재를 듬뿍 얹을 때 나는 내가 심은 그 개나리 가지가 어서 자라기를 두 손 모아 빌었지. 그 가시나의 장독대 옆에 치렁치렁 늘어뜨려진 그 개나리 넝쿨처럼 말이야.


그리하여 노오란 개나리꽃이 우리집 장독대 옆에 하나 둘 매달리기 시작하면 나는 그 가시나한테 보란듯이 자랑을 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 꿈은 내가 그 개나리 가지를 뽑는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어. 그리고 이듬해 그 이듬해 봄에도 그 가시나가 개나리 가지를 주었지만 나는 한번도 살려내지 못했어.

"아나! 이거 소줏병에 꽂아놓고 골치 아픈 일이 생길 때마다 쳐다봐라. 그라모 마음이 쪼매(조금) 괜찮아질끼다"
"해마다 니한테 쪼매 미안타."
"미안키는(미안하기는). 그기 쪼매 미안타꼬 생각되모 그 개나리꽃을 볼 때마다 내 생각도 쪼매 하모 될 끼 아이가."


a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 이종찬

그래. 어쩌면 그 가시나는 예쁜 새를 끔찍이도 사랑하다 죽어 개나리꽃으로 다시 피어났다는 전설 속의 그 인도 공주였는지도 모르지.

예쁜 새라면 모조리 사 들여서 궁전 안이 온통 예쁜 새들로 가득했지만 금빛 새장 하나를 비워놓고 더 예쁜 새를 기다리며 살았던 그 인도 공주. 그리하여 마침내 공주는 그녀의 바람처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새를 갖게 되었지. 또 공주는 그때부터 다른 예쁜 새들을 모두 날려보내고 그 새 한 마리만 지독하게 사랑했어.

그러나 세월이 점점 흘러가자 어느 순간 그 예쁜 새는 흉측한 까마귀로 변하고 말았지. 처음 그 새를 전해준 허름한 노인에게 깜빡 속고 말았던 거지. 그 때문에 인도 공주는 열병을 심하게 앓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어. 그리고 그때부터 공주의 넋이 금빛 새장 같은 개나리꽃으로 피어났다는 거야.

그래. 어쩌면 그 가시나도 노오란 개나리꽃으로 나를 유혹해 그녀의 새장 속에 가두려 했는지도 몰라. 또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가시나는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새로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아니, 지금도 그 가시나는 개나리꽃을 한묶음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개나리꽃이 하나 둘 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때 일을 떠올리고 있는 나처럼 말이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2. 2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5. 5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