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이 피어날 때면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49>공장일기<31>

등록 2004.04.08 15:36수정 2004.04.0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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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금도 공단관리청 뜨락에는 그때 그 복사꽃이 환하게 피어나고 있을까

지금도 공단관리청 뜨락에는 그때 그 복사꽃이 환하게 피어나고 있을까 ⓒ 이종찬

1985년 봄, 끝 간 데 없이 쭉쭉 뻗은 공단대로변의 개나리와 벚꽃나무 가지에서 연초록빛 싹이 막 틀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맘때면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금빛 글씨가 눈이 부시던 창원공단관리청 뜨락에서 복사꽃과 살구꽃이 연분홍빛 입술을 뾰족이 내밀었다.


그날 아침에도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조립부로 향했다. 당시 조립부 현장에는 창현이가 옷가게를 한다며 그만둠으로써 남성노동자라곤 유일하게 나 하나뿐이었다. 또한 창현이가 그만 둔 뒤부터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나는 창현이의 몫까지 몽땅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예. 이거 좀 봐 주이소."
"아니, 이건 불량품 아입니꺼? 도대체 제품검사로 우째 하는 기고? 이런 제품이 많이 나옵니꺼?"
"그기 아이고예. 이거."
"이기 뭡니꺼?"
"저 쪽 라인 끝에서 두 번째로 앉은 가시나 있지예? 저 가시나 저기 댁한테 이거 좀 전해주라카데예."

그 여성노동자가 내게 준 것은 복사꽃 빛 쪽지였다. 순간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라인 끝에서 두 번째로 앉은 그 여성노동자는 조립부에서도 '미스 조립'으로 불릴 정도로 얼굴이 예쁘고 몸매도 늘씬한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왜 나한테 야릇한(?) 쪽지를 건네준단 말인가. 그것도 다른 여자를 통해서 말이다.

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쪽지를 건네주는 그 여성노동자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면서 은근슬쩍 그 쪽지를 작업복 아랫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제품을 나르는 척하면서 엉거주춤 화장실로 향했다.

설마. 저렇게 예쁜 여자가 나같이 못난 이한테 무슨 관심이 있겠어. 보나마나 다른 이한테 뭘 전해달라는 심부름이겠지.


'오늘 저녁 7시, 공단관리청 왼쪽 복사꽃나무 옆 벤취.'

화장실에서 슬며시 펴 본 그 쪽지 끝에는 '※남의 눈에 띄지 말고 꼭 혼자 나올 것'이라는 추신까지 붙어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뭐야. 나를 만나겠다는 거 아냐. 근데 나를 만나서 어쩌겠다는 거지.’ 어지러웠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녀의 속내를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나는 진종일 그녀의 쪽지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내가 그녀가 앉아 있는 라인에 조립할 제품을 건네줄 때, 그녀와 몇 번이나 눈빛이 마주쳤는데도 얼굴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혹시 내가 순간적으로 눈에 허깨비가 씌어서 쪽지를 잘못 읽었나. 아니면 그녀가 내 마음을 은근슬쩍 저울질하려고 일부러 장난을 치는 것일까. 근데 오늘 내가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행여 나갔다가 바람이라도 맞으면 어쩌지. 그녀들이 그런 나를 보고 얼마나 킥킥거리겠어. 창현이도 없는 마당에.

a 누가 내게 저 복사꽃 가지 하나 꺾어다오

누가 내게 저 복사꽃 가지 하나 꺾어다오 ⓒ 이종찬


"여기예."
"……"
"근데 와 조금 늦었어예?"
"시간이 쪼매 남아서 외동 가서 막걸리 한 잔 묵고 온다꼬예. 근데 와 낼로 보자고 캤습니꺼. 내가 머슨 실수라도 했심니꺼?"
"ㅋㅋㅋ. 그기 아이고예, 꼭 그기한테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 기 있어서예."
"머슨 부탁인데예? 퍼뜩 해 보이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아까 내게 쪽지를 건네 준 여자의 이야기를 슬며시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같은 마을, 그러니까 목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우리 공장 생산부 남자를 너무도 사랑한다는 거였다. 근데 그 생산부 남자는 어찌된 일인지 그녀를 아예 무시한다고 했다.

그 때문에 속이 너무도 상한 그녀는 늘상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면서 아예 살기조차 싫다는 말을 밥 먹듯이 내뱉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내버려두면 그녀가 진짜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지금의 상황이 우리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정말 난감했다. 생산부에서 일하는 그는 예전부터 내가 잘 아는 친구였다. 하지만 그는 사귀는 여자가 따로 있었다. 그것도 1여년 전에 창현이와 내가 다리를 놓아 서로의 만남이 이루어진 사이였다. 그런데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고 그녀에게 그런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꼬 친구가 죽기까지 하겠습니꺼?"
"집에 가보모 맨날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만 틀어놓고 있어예. 그것도 녹음테이프 앞뒤가 모두 '창밖의 여자'만 녹음되어 있고예."
"그 참!"
"그라이 우째 좀 해 보이소. 그 문제만 해결해주모 그기가 하라는 데로 다 할께예."
"그래, 결국 그 말 할라꼬 내로(나를) 따로 불러냈습니꺼?"
"???"

그날 나는 그녀한테 어려운 부탁을 받아 난처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이야기라면 꼭 단 둘이 만나서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하긴 '미스 조립'으로 불릴 정도로 예쁘고 늘씬한 그녀의 쪽지를 받고 은근히 그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던 내 마음이 잘못된 거지.

그때부터 나는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립부에서 제품을 나르다가도 그녀들이 앉아 있는 라인 근처를 지나가기가 두려웠다. 또한 '그 문제만 해결해주모 그기가 하라는 데로 다 할께예' 라며 벤치 옆에 예쁘게 피어난 복사꽃 가지 하나를 꺾어주던 그녀의 하얀 손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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