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는 삶보다 더 진지하다 ②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 관점에서 본 '놀이'

등록 2004.04.06 19:41수정 2004.04.0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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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는 문화보다 오래된 것이며, 인간의 전유물도 아니다.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며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언제나 함께 해왔고,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인 동시에 유희의 인간 ‘호모 루덴스’였다. 호모 루덴스로서 인간의 놀이 중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상위의 차원을 가진 것은 축제나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제의로서의 놀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그 집단의 안녕에 기여해 왔다. 오늘날에도 그 형식만 조금 변했을 뿐 모든 나라, 모든 집단에서 이런 놀이가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다.


성스러운 의식은 모두 놀이 공간에서 벌어진다. 놀이가 끝나도 이 효과는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음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우리의 일상을 윤리적으로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장례 같은 숭고한 제의가 아니더라도 이런 측면은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각종 시상식은 일종의 제의(ritual)로서 해당 분야의 일상을 견인한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각종 인터넷 이벤트 속에서도 이런 면을 찾을 수 있다. 일상을 벗어난 놀이로서의 환상은 일상을 지탱해주는 힘이다. 환상(illusion)이란 말의 어원은 놀이에 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a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 까치

이런 면을 확대해 보면 놀이란 사회의 긴장과 욕구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놀음이나 스포츠에서 긴장은 절정에 달하곤 하는데, 조성된 긴장을 놀이의 규칙 속에서 해소함으로써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은 해방감과 즐거움을 경험하고, 긴장을 해소하는 방식에 대해 서로 소통한다.

놀이 행위가 선악의 영역 밖이기는 하지만, 긴장 요소는 그 놀이 행위에 대해 윤리적 내용을 부여한다. 이겨야하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경기의 법칙만은 따라야 하기 때문에 ‘공정성’의 정신력이 요구된다. (요한 호이징하, 김윤수 역, <호모 루덴스>, 까치, 24쪽 )

놀이의 순수성과 놀이의 형식


어린이는 성스러울 정도로 ‘완전하게’ 논다. 질서, 긴장, 운동, 변화, 장엄, 율동, 환희는 놀이의 고유한 특성인데, 어린이는 완전하게 놀이에 몰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놀이의 요소와 특성을 체득한다. 성스러운 놀이의 영역에서 어린이는 시인이다. 시인은 아이처럼 상상하고 완전하게 노는 예술가이다. 구아르디니는 <예배의 정신>에서 예배는 놀이의 최고의 예로, ‘목적은 없으나 의미는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놀이의 반대말을 굳이 찾자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주5일제가 확대되고 있긴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휴일을 둔 까닭은 일상을 정지시키고 모든 ‘업무’를 다음 날로 연기시킴으로서 성스러운 휴일(holy day)을 제의를 비롯한 놀이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함이었다.


웹에는 휴지(pause)가 없다. 적어도 강제적인 휴지 장치가 없다. 이런 장치가 없기 때문에 주기성은 깨지고, 웹의 실시간성, 연속성은 비주기성, 불규칙성을 낳는다. 웹이 일상과 크게 다른 점을 찾자면 바로 강제적 휴지가 없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웹은 연속적인 놀이 공간이 되며, 동시에 불규칙적인 놀이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물론 좋고 나쁨의 문제는 아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에는 어느 배심원이 법정에 들어서면서 ‘만일 여기서부터 내 자리에 닿을 때까지 걸음 수가 짝수라면, 오늘은 배가 아프지 않을 거야’ 라고 혼자 말하는 부분이 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는 주인공들이 전철 속에서 금을 정해두고 여기를 지나는 사람이 어느 쪽 발을 내딛는가에 따라 서로의 뺨을 때리는 놀이를 한다.

놀이의 일반적 성격 중 뚜렷한 것은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어떤 것을 ‘거는 것’, 그러니까 어떤 가치를 걸고 그것을 쟁취하는 것은 놀이의 영역이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생명보험은 ‘내기’로 불렸다고 한다. 놀이가 아닌 것이 놀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놀이의 또 다른 성격은 ‘우월성의 확인’이다. 놀이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경기’라고 불리는 것들이 모두 이 성격을 잘 나타낸다. 우월성의 확인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동반한다. 쉽지 않은 마술을 훌륭하게 수행했을 때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면 노는 사람의 기쁨은 두 배가 된다.

혼자 하는 플래시몹, 구경꾼 없는 플래시몹이 재미있을 수 없다. 네티즌이 자신이 작성한 게시물의 조회수에 민감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연말연시가 되면 텔레비전과 각종 언론 매체를 도배하는 각종 시상식을 보라. 사람들이 우월성을 다투는 방식은 이런 상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하다.

놀이의 일반적 성격이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우월성의 확인이라고 한다면, 이 둘을 모두 담고 있는 고전적인 놀이로 수수께끼를 꼽을 수 있다. 승부를 가리는 어떤 경기나 카드놀이 같은 놀이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상당수의 놀이가 바로 수수께끼와 비슷하거나 수수께끼의 변주에 속하는 것이다.

수수께끼는 비밀스러운 힘으로 충만된 성스러운 것이며, 따라서 위험한 것이다. 논리적 추론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질문자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는 숙고나 추론이 아니라 게임의 규칙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같은책, 173쪽)

놀이 파괴자와 사기 놀이꾼

놀이 파괴자가 규칙을 위반하는 반면, 사기 놀이꾼은 규칙을 철저히 준수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놀이 공동체는 놀이 파괴자보다 ‘노는 체만 하고 목적은 따로 있는’ 사기 놀이꾼에 대해 훨씬 더 관대하기 마련이다. 놀이 파괴자는 놀이 세계 자체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같은책, 24쪽)

어떤 놀이든 놀이 파괴자와 사기 놀이꾼이 있기 마련이다. 선의이든 악의이든 어떤 다른 목적이 있어, 인터넷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하고 있다면 ‘사기 놀이꾼’ 에 가깝다. ‘플래시몹’ 현상을 염탐하기 위해 ‘플래시몹’ 카페에 가입했던 나도 그런 면에서는 사기 놀이꾼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최소한 플래시몹 카페를 붕괴시키진 않는다. 만일 플래시몹이 벌어지는 현장에 참가한 플래시모버가 몹지시서를 기자에게 공개하면 어떨까.

마찬가지로, 영화 <식스센스>를 보고 난 관객이 극장을 나오면서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 라고 소리친다든지 <올드보이>를 보고 나서 ‘미도가 오대수의 딸이다’라고 외친다면 전적으로 그는 놀이 파괴자가 된다.

놀이의 영역에 스포일러가 낄 자리는 없다. 디시인사이드 게시판에서 ‘안녕하세요. 사진 하나 올립니다. 의견 주십시오’라고 공손하게 말하는 사람은 놀이 파괴자다.

놀이 파괴자는 자기들 편에 서서 새로운 놀이 규칙을 가진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다. <딴지일보>의 편집 방향과 그들의 놀이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다른 놀이 규칙이 통용되는 공동체를 만들면 된다. 미디어몹은 바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다른 놀이 안에서 각각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며 또한 달리 행동한다. 오프라인에서 이강룡은 온라인에서는 'readme'라 불리며, 커뮤티니마다 다른 아이디를 사용한다. 때로 익명이 필요한 채팅에서는 ‘티티카카’가 되기도 한다.

업무상 대화가 많은, 일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MSN 메신저에서의 나와 또 다른 익명의 이성과 대화하는 버디버디 메신저에서의 나를 견주어 본다면 겹치는 부분은 도저히 찾을 수 없다. 이것의 문제는 놀이의 구획을 긋는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이 구획을 구분하지 못하면 왕따가 된다.

제의가 신성한 것은 일종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 놀이이기 때문이다. 회원 등급에 따른 권한이 명확한 인터넷 카페 활동이나 평민으로 시작돼 등급이 상승되는 지식검색과 비교해 보라. 순수하게 ‘자발적’ 참여라는 전제가 없다면 놀이는 일종의 폭력임에 분명하다.

놀이라는 행위는 사회적 단체의 형성을 촉진하는데, 그러한 단체는 어떤 비밀로써 자신을 감추려고 하고 또 변장과 다른 수단을 동원하여 일상 세계와 그들 사이의 다른 점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 같은책, 27쪽 )

페어플레이를 위하여

일상은 놀이의 룰을 깨는 영역이다. 스포츠는 놀이로 시작됐지만 놀이의 룰을 정면으로 깨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놀이의 영역에서 일탈하고 있다.

아마추어와 프로가 나뉘게 되면서부터 스포츠는 놀이 영역을 떠나고 있다. 프로페셔널의 정신은 놀이의 정신이 아니다. 지나치게 진지해져 순수한 경기들이 오염됐고, 기술적 조직과 과학적 완전성이 극도에 달하며 놀이와 결별하게 된 것이다.(같은책, 294쪽 )

<호모루덴스>는 페어플레이를 위한 문화사적 보고서이다. 호이징하는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부터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 지를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됐다"고 지적한다. 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유머의 쇠퇴 때문이고, 놀이가 변질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CNN을 통해 전쟁을 관람하는 것이 놀이가 돼버린 점, 스펙터클로서의 전쟁은 분명한 놀이의 변질이며 심각한 오해이다. 호이징하가 <호모 루덴스>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놀이에 따르고, 승복하는 것을 통해 놀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문명을 빛나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놀이는 삶, 전부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명은 어떤 놀이 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명은 자제와 극기를 전제로 하며, 또한 그 자신의 경향을 궁극적 최고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어떤 일정한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명은 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일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같은책, 31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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