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의 첫 공개변론이 열린 지난 3월 30일 오후 헌법재판소 대법정에서 국회소추위측(왼쪽)과 노대통령변호인측이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맨 왼쪽이 김기춘 소추위원.연합뉴스 진성철
5공의 핵심인물들이 '역사의 법정'에 전면 재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다름아닌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가 계기가 됐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헌법질서를 어지럽힌 5공화국은 이미 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5공의 핵심세력 가운데 몇몇이 다른 곳도 아닌 헌법재판소 법정에 서서 '의회쿠데타'를 극력 변호하고 나섰다.
그들과 반대편에서 노 대통령을 포함, 그를 변호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5공화국 당시 독재의 그늘에서 탄압을 받았거나 아니면 민주화운동을 벌였던 인사들로 이들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 마디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2일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지 한 달이 됐다. 이후 탄핵의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가 심리가 진행중이다. 헌재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측의 공방은 역사를 2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같은 착각이 들게할 정도다.
지난달 30일 첫 공개변론에 이어 지난 9일 열린 3차 공개변론 과정에서 쏟아진 소추위원측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와 시대착오적인 발언 등을 정리해본다.
[1차 공개변론] 김기춘 소추위원 "선거운동 바쁘다... 변론 연기"
"앞으로 김기춘의 손에 달렸다."
지난 3월 12일 노 대통령 탄핵안이 타결된 뒤 정형근 의원이 한 말이다. 김기춘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탄핵심판 과정에서 검사역할을 맡은 소추위원으로 자동선임된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 헌정사의 최대 오욕 중 하나인 72년 유신헌법의 초안작성자로 지목된 바 있는 인물이다.
원로 헌법학자 한태연(88) 전 서울대 법대 교수가 지난 2001년 12월 8일 한국헌법학회 주최로 서울대 근대법학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역사와 헌법' 학술대회에서 유신헌법 제정 경위에 대해 "신직수 법무부 장관과 김기춘 과장이 주동이 돼 법안을 모두 만든 상태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김 의원의 약력을 살펴보면 과거 독재시절에서의 맹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지난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를 합격하면서 검사로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고 박정희 대통령 정권 시절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국장, 청와대 법률비서관(79년)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는 1988년 제22대 검찰총장에 올랐으며, 1991년 제40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신한국당(전 한나라당)으로 제15대 국회의원(경남 거제)에 당선돼 16대 의원으로 연임 당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김 의원이 역사적인 탄핵심판의 첫 공개변론이 열린 지난달 30일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대통령의 진퇴를 결정하는 중대성을 볼 때 정확히 해야하고 재판부의 졸속진행은 이뤄지면 안됩니다. …아시다시피 4월 1일이 국회의원 후보등록 마감일이고 4월 2일부터 국회의원 선거운동이 시작됩니다. 저는 지역구 출마를 위해 물리적으로 (4월 2일) 출석이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2차 기일을 정하는데 적절히 조정해 줄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이때 기자들은 '국가적 중대한 탄핵심판에 임하면서 선거라는 개인적인 문제로 불참한다는 것이 납득이 안간다'는 의미로 소추위원측의 대리인단인 하광용 변호사에게 질문하자, 하 변호사는 "국회의원 선거가 개인적인 문제라고 하는데, 국회의원도 헌법기관"이라며 "대통령만 중요한 게 아니고 (선거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고 항변했다.
소추위원측의 '황당 행보'는 이것이 시작이었다.
[2차 공개변론] 소추위원측 한병채 변호사... 보이지 않는 영향력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