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중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영어단어를 외우고 또 외워도 자꾸만 잊어 버리는 인간의 속성을 꼬집는 말이었다.
영어 선생님은 인간은 잊기 때문에 살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신이 망각을 인간에게 선사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뇌는 용량을 초과해버린 하드웨어처럼 작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긴, 가슴 아픈 순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살다간 아마 화병에 걸려 제 명을 다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영어 선생님은 자꾸 영어단어를 잊는 걸 속상해 하지 말고 잊어버려도 또 외우고, 잊어버려도 또 외우라고 했다. 그래도 신은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에 외우고, 또 외우면 그 단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거’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과거가 얼마나 추악했는지, 그들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암적 존재였는지, 그들이 한번도 혀를 놀려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저 잊혀지기 위해 침묵할 뿐이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그들 또한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기다린다. 정치적으로 다시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논리와 시기가 다가오기를. 칠판에 쓰여진 그들의 잘못은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리고선.
이제 그 지우개의 쥔 손을 우리의 표심으로 막을 때이다. 우리가 말해줄 차례다.
“누가 잊어? 너라면 그걸 잊었겠어? 우린 아직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구”
며칠 전, 어머니가 종교 행사에서 전직 국회의원의 동생을 만났다고 한다. 그 분 말씀이 이랬다. “남자로 태어나면 국회의원 한번 해봐야 하고, 여자로 태어나면 국회의원 아내 한번 해봐야지.”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국회의원이 사회적 지위를 드높이기 위한 액세서리인가. 국회의원이 자신의 남자다운 기개를 자랑하는 보증수표인가.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한 마디 따끔하게 해주시지 그랬어요?” 라고 묻자, 어머니는 정확히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기세에 눌려 반박하지 못했다며 분해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