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화창한 봄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가 누우신 3평 남짓한 땅도 초록의 잔디로 덮여 있었다. 아버지가 잠 드신 지도 어느덧 만 6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면 가슴 한 쪽이 서늘해지고, 어금니를 물게 된다.
살아계실 때, 아버지는 나의 최대 라이벌이었다. 막내이자 장남이었던 나는 시시때때로 아버지와 대립했다. 좀처럼 무엇 하나 같은 취향이 없을 정도였다. 시국에 관해서도, 종교에 관해서도, 심지어 미래의 설계에 대해서도 아버지와 나는 너무나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시시각각 부딪쳤다.
20대의 나는 지나치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아이였다. 아버지는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주장은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언젠가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넌 안 돼" 그렇게 말해도 돼요. 그건 아무 상관없어요. 오히려 더 독기를 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면 그건 달라요."
제대를 3달 정도 남겨두었던 때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그 때 이미 간경화 진단을 받으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파주까지 아프신 몸으로 직접 운전을 하고 나를 찾아와 말씀하셨다. 입을 여시는 그 순간, 오랫동안 고민하셨다는 걸 나는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제대하고 나면 문예창작과로 편입해라. 요즘엔 편입도 가능하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부대 위병소를 빠져나갈 때,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고, 아버지의 이야기인데, 내가 정말 '글 쓰기의 힘겨움'에 대해 곰곰이 고민해 보았는지 내게 자문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