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만 보세요, 만지면 찔립니다

내게로 다가온 꽃들(46) 아침 하늘에서 만난 '줄딸기'

등록 2004.04.27 10:34수정 2004.04.2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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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딸기
줄딸기김민수
딸기는 열매가 익은 뒤에는 대부분 빨간색이며, 꽃은 흰색입니다. 딸기 꽃 중에는 간혹 연분홍색에서 연한보랏빛도 있습니다. 특히 뱀딸기 꽃은 노란색입니다. 연한보랏빛을 띠고 있는 멍석딸기는 꽃인가 싶을 때 열매를 맺고, 꽃 모양도 작아서 그냥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줄딸기는 그런 점에서 좀 특별한 꽃입니다. 딸기의 열매는 빨간색으로서 식용이 가능하고, 연분홍색의 꽃은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지도 않아서 편안하고 예쁩니다.


김민수
뱀딸기나 우리가 주로 먹는 딸기는 다년초로서 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줄딸기같은 것은 '나무'에 속하고, 이런 것들은 대부분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줄기나 꽃받침에 가시를 달고 있지만 줄딸기는 줄기보다는 꽃받침에 더 많은 가시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3월 초, 북제주군 조천읍 조천리의 바닷가를 산책하다 양지바른 길가에서 만난 줄딸기는 조금 이른 시기에 핀 것 같았습니다. 꽃줄기를 길게 낸 후, 꽃을 달고 있는 모양새를 보면 봄이 어디쯤 오는지 까치발을 들고 있는 듯한 형상입니다.

김민수
조천(朝天)은 항일정신이 투철한 곳으로 조천만세동산과 항일기념관이 있고, 해마다 3∙1절이면 조천만세동산에서 기념행사를 갖기도 합니다. 제주는 일제치하뿐 아니라 4∙3항쟁이나 삼별초의 난 등 역사의 아픔들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초들의 마음도 까치발을 들고 이제나저제나 해방의 날이 올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겠지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봐서인지 그들이 달고 있는 가시가 차라리 더 억세서 누구라도 범접할 수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됩니다.

김민수
곽재구 시인은 <포구기행>에서 조천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랫동안 이곳 바닷가를 그리워했습니다. 이름 때문이었지요. 아침(朝)과 하늘(天), 처음 이 이름을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알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이 가슴 한 쪽에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이름을 '아침 하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아침'이라고 생각했지요. 신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곽재구 <곽재구의 포구기행> p.229)


하늘의 아침을 열어 가는 곳이라는 시인의 찬사도 조천을 표현하기에 멋들어진 말이지만 저는 오히려 '아침 하늘'이 더 정겹게 다가옵니다.

김민수
도시에서 살아갈 때는 아침 하늘을 바라볼 겨를도 없이 살았습니다. 아침 하늘이 열릴 때 땅 속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도로에 늘어선 차들의 번호판을 쫓아 밀리는 출근길을 재촉하느라 아침 하늘을 맞이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잊고 살았던 것이죠.


그러나 이제 조금은 아침 하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삶의 보폭을 조금 천천히 하고, 삶 자체를 느릿느릿하게 가고자 하니 하늘의 아침도 보게 되고, 길가에 또는 산야에 피어있는 작은 꽃들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도시생활에서 상처받은 마음들을 조금씩 회복해 갈 수 있었습니다.

김민수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그 섬에 내가 있었네>의 저자 김영갑님의 두모악갤러리를 방문했습니다. 밥 먹을 돈을 아껴가며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며 제주의 오름과 바다, 노인과 해녀, 들판과 구름, 억새를 담았던 그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몇 년 전부터 루게릭병에 걸려 마음껏 찍고 싶었던 풍광들을 렌즈에 담지도 못한 채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워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그곳을 찾는 한 두 사람을 위해서도 그 야윈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힘있고 맑게 두모악갤러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김민수
그는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섬에는 어느 마을을 가나 외로운 노인들이 많기에 가는 곳마다 내 잠자리가 있었다. 언제 찾아가도 반겨주는 노인들의 말동무가 되어주면 끼니는 해결되었다. 외로운 노인들의 넋두리를 들으며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어주면 신이 나서 좋아했다.' (김영갑 <그 섬에 내가 있었네> p.47)

감히 이어도를 보았다고 말하는 그를 보고 잠자리에 든 그날 밤, 나는 꿈결에서 그와 함께 밤새도록 제주의 오름을 걸었습니다.

김민수
줄딸기는 길게 뻗은 줄기의 근원에서 꽃을 피울 에너지를 얻고, 아침 하늘을 향해 줄기를 낼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 삶도 근원을 어디에 놓고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같습니다.

전에 딸기를 소개해 드리면서 딸기의 꽃말이 '존중과 애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줄딸기는 '존중과 애정'을 줄줄이 달은 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습니다.

김민수
어떤 꽃은 만나면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어떤 것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꺾을 수 있는 것도 있고, 바라만 보아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줄딸기는 꺾기가 쉽지 않은 꽃이요, 다가가기가 수월하지 않은 꽃에 속합니다. 잔가시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꺾으면 이내 시들어버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김민수
이번 여행은 이전의 <내게로 다가온 꽃들>과는 조금 다르게 접근을 해보았습니다. 같은 꽃이라도 어디에 피어있는지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서 있는 곳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고, 내가 선 자리를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아침 하늘(朝天), 오늘도 어김없이 아름다운 하늘이 열리고, 줄딸기들도 또 다른 모습으로 아침의 하늘을 맞이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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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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