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를 닮은 꽃 '현호색'

내게로 다가온 꽃들(45)

등록 2004.04.23 07:19수정 2004.04.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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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색
현호색김민수
온 가족이 함께 들꽃을 찾아 여행을 떠날 때면 참 행복합니다. 물론 여행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지도 모릅니다. 집 근처의 오름을 산책하며 꽃에 관심을 두면 들꽃 기행이요, 나무에 관심을 두면 나무 기행, 곤충에 관심을 주면 곤충 기행이기 때문입니다.

제주시에 일이 있어 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좀 더 편안한 일주도로로 가자고 하지만 저는 꼭 중산간도로를 택합니다. 일단 신호등이 적고, 계절따라 변하는 나무들과 오름의 풍경을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거든요. 게다가 잠시 쉬었다 가자며 가족을 이끌고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아기자기한 자연의 모습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넓게 포장된 일주도로보다 구불구불 이차선 도로지만 중산간도로가 더 정감이 갑니다.

김민수
온 가족이 함께 아름다운 꽃 '현호색'을 만났던 날. 이리저리 꽃을 보던 막내가 한 마디 합니다.


"아빠,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거다."
"어디서 봤지? 아빠가 찍은 사진에서 봤나?"
"아니, 냉장고에서 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질 않았습니다. 지난 해부터 현호색에 빠지긴 했지만 캔 적도 없는데 느닷없이 냉장고에서 현호색을 봤다니요. 무슨 말인가 궁금했습니다.

"아빠, 맞다, 맞어. 멸치다 멸치!"

온 가족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에 조용하던 숲 속이 들썩거립니다.

김민수
정말 그렇습니다. 현호색의 모양새는 마치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입을 크게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듯합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마른 멸치를 보는 것도 같습니다. 현호색의 속명 'Corydalis'는 '종달새'란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꽃 모양이 종달새 머리의 깃과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김민수

윤동주 시인의 <종달새>라는 시가 있습니다.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 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 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 길로
고기 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김민수
암울한 조국의 현실, 질디 진 거리의 뒷골목 같은 현실에서 명랑한 봄 하늘을 소망하는 노래입니다. '종달새'와 관련된 속명을 가져서일까요. 현호색은 명랑한 봄 하늘을 나는 종달새처럼, 요염한 봄 노래를 불러주는 종달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요즘 한창이긴 하지만 현호색은 한라산 기슭에 잔설이 남아있을 때부터 양지바른 곳에서 하나 둘 피어납니다. 작디 작은 이파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듯하다 어느 봄날 음악회라도 열듯이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릅니다. 각양각색의 현호색을 직접 보면 반하지 않을 분이 없을 겁니다. 저는 제주에 와서 들꽃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 아름다운 현호색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김민수
현호색은 때가 되면 지천에 피어나 하늘거리는데 왜 할미꽃이나 민들레, 개나리 같은 꽃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다른 식물들은 꽃이 지고 나면 열매도 맺고, 이파리도 가지고 있다가 겨울이 되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현호색은 꽃을 피운 후 한달여가 지나면 흔적도 없이 땅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죽은 듯이 말입니다. 잠시 잠깐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가기 때문에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김민수
현호색이 한창 피어날 즈음이면 또 다른 꽃이 가장 화사했던 시간들을 마무리합니다. 복수초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시 복수초도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꽃입니다. 그래서 이미 죽은 줄 알고 화분을 버렸는데 이듬해 봄에 버려진 그 화분에서 복수초가 피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아마 현호색도 그렇겠지요.

이 둘의 공통점은 참 부지런히 피었다 부지런히 지는 꽃이라는 점입니다. 복수초도 그렇고 현호색도 그렇습니다.

김민수
현호색의 뿌리는 덩이줄기입니다. 그 덩이줄기는 생명력이 무척 강하다고 합니다. 달래보다 조금 더 큰 덩이줄기는 약재로 사용됩니다. 특히 진통 효과가 뛰어나 두통이나 치통 등에 진통제로 사용이 되고, 혈액 순환도 도와준다고 합니다.

저는 현호색이 심통(心痛) 즉, 마음의 고통까지도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아름다움의 묘미 때문에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 있으니까요.

김민수
지난 해 어느 분이 화분에 잘 심어진 새우란 한촉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새우란은 올해도 예쁜 꽃이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 새우란보다 저를 더 흥분시킨 것은 새우란 곁에서 현호색이 작은 새싹을 내며 피어오른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씨앗이 날아온 것 같은데 내년에는 현호색을 집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어떤 색의 꽃을 피울지도 참 궁금합니다.

김민수
파스텔 톤의 예쁜 현호색. 그들을 바라보며 온 가족이 함께 현호색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답니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되었을 때에도 온 가족이 함께 들꽃을 보며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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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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