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을 캐시는 팔순 어머니

어머니의 북한 룡천 생각

등록 2004.04.30 13:51수정 2004.04.3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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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요일 오전의 레지오 단원들을 위한 미사에 참례하고 레지오 주 회합에도 참석한 후 낮 12시쯤 돌아오신 어머니는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는지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었다. 아직 거실 컴퓨터 앞에서 일상적인 오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아들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어머니는 뭔가 말을 아끼시는 기색이었다.

오후 1시쯤 어머니가 차리신 점심상 앞에 앉았다. 모자가 함께 식사를 하는데, 어머니가 얘기를 꺼내셨다.

성당에서 미사 중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강론 시간에 신부님이 돌연 제대 위의 마이크를 빼 가지고 제대 앞으로 오시더니, "한결이 할머니, 나오세요" 하시더란다. 거듭 재촉을 하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영문도 모르고 제대 앞으로 나갔는데, 신부님이 마이크를 주며 "지난주 금요일 청남대를 갔다 오던 버스 안에서 한결이 할머니가 암송하신 성서 구절을 오늘 다시 한번 암송해 보세요"하시더란다.

그리고 어머니는 지난 23일의 일을 먼저 꺼냈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성당 노인 120여분이 버스 세대로 청남대 관광을 하고 천안 성거산 성지에 들러 옛날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묘소 앞에서 기도를 하고 돌아올 때 있은 일이었다.

당신에게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남김없이 아들과 며느리에게 들려주시곤 하는 어머니가 왜 그 얘기는 하지 않고 아끼셨는지 의아스럽기도 했다. 물론 어머니는 청남대와 성거산 성지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는데, 그 행사를 마련한 성당 사목회장 김용순씨에게 감사하는 말씀을 주로 많이 하셨다.


"사목회장 나이가 올해 쉰 아홉이랴. 어머니가 쉰여덟 나이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예순네살 잡숫고 돌아가셨디야. 어머니 아버지가 그렇게 너무 일찍들 돌아가셔서 그게 늘 한이 된디야."

일찍 돌아가신 자신의 부모께는 효도를 못하는 대신 성당의 노인 분들을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으로 김용순 사목회장은 이번 노인 관광 행사를 마련했다고 했다. 버스 3대 대절비와 음식비, 기타 모든 경비를 김용순 회장이 단독 부담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휴게소에서 자판기 커피까지 자기 돈으로 사주더라니께. 그 숱헌 사람을 글쎄…. 해간 사목회장 부부가 똑같이 노인들을 잘 모실라구 어찌나 애를 쓰는지…."

그리고 어머니는 또 이런 말도 했다.

"그런디 청남대서는 숱헌 사람이 붐비는 가운디서두 쌩쌩 잘만 돌어댕기던 할메 할아베들이 성거산 성지서는 다리 아프다고 순교자 묘소에두 안 올라가더리니께. 성거산 성지까지 가서 '십자가의 길' 기도두 허지 않구 온 할메 할아베들이 많어."

그 말을 들을 때는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었다. 평생을 고생주머니로 살아오신 어머니, 노년에 네번이나 수술대 위에 누우셨던 분, 3년 전 대장암 수술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간헐적인 설사 때문에 고생하시는 노인네가 그 날은 아무런 문제도 겪지 않고 누구보다도 기운이 좋으셨다니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청남대로 갈 때와 천안 성거산으로 이동할 때는 다른 버스에 탔던 신부님이 돌아올 때는 어머니가 타고 있는 버스로 오셔서 노인들 한 분 한 분께 마이크를 드리고 노래를 시키셨다고 했다. 어머니도 차례가 와서 옛날 노래를 하나 불렀는데, 잠시 후 또다시 마이크를 주시며 신부님이 "소설가님의 어머니께서 특별한 노래 하나 허셔야지요" 하시더란다.

"노래는 아는 것두 읎구 잘 불를 줄두 물르구요, 작년 5월 20일날 레지오 미사 때 신부님이 읽으시구 나서 외우라구 허신 복음 있지요. 내 맘에 쏙 와 닿구 너무 좋은 말씀으로 느껴져서 그 복음 구절을 외웠는디요, 노래 대신 그 복음 구절을 외워볼 게요."

그리고 어머니는 팔순을 자시던 지난해에 외웠다는 요한 복음 15장 9∼11절의 말씀을 암송했다고 한다.

그런데 22일의 버스 안에서의 그 일을 기억 속에 담아 두신 신부님이 29일의 레지오 미사 때 어머니를 제대 앞으로 불러내시고 다시 한번 그 복음 구절을 암송하게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당황되어 다리가 약간 떨리는 가운데서도 200명이 넘는 신자들 앞에서 그 복음 구절을 막힘 없이 또렷하게 암송했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지난해 5월에 외우신 다음 수시로 되새기는 요한 복음 15장 9∼11절의 말씀은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으로 지칭하는 부분의 일부 구절이었다. 내 어머니가 <매일미사> 책에서 외운 복음 말씀을 그대로 소개하자면 이렇다.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도록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주님의 말씀입니다.

별로 길지는 않더라도, 팔순 노인네가 성경 구절을 외우고 더 나아가 그 복음 말씀을 늘 가슴에 되새기며 사신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어쩌면 성경 구절을 외운다는 것보다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도 가슴 깊이 지니셨기에 어머니의 그 암송이 지속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신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미사 후에는 여러 신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는데, 큰 수녀님이 웃으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잘 못한다 싶게 했어야 하는데 너무 또렷하게 하셔서 앞으로 한결이 할머니, 성가신 일이 또 생길지 몰라요."

(2)

어머니는 어제 서산의 이비인후과의원을 다녀오셨다. 며칠 전부터 귀가 우는 증상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소녀 시절 중이염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애옥살이 속에서 중이염 치료를 확실하게 하지 않은 탓에 그게 그만 고질이 되어 종종 이비인후과 신세를 지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어머니의 양쪽 귀는 고막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게다가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별 불편 없이 잘 들으며 사시니 신기한 일이라며 의사 선생님이 또 감탄을 하시더라고 했다.

양쪽 모두 고막이 없는 귀로도 어머니는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잘 헤아리신다. 텔레비전 앞에 앉으면 연속극보다 뉴스에 더 열중하신다.

요즘에는 북한 룡천 참사 때문에 어머니의 상심이 크다. 남한에서 보내는 구호물자가 신속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을 몹시 안타까워하신다. 즉시 육로로 가지 못하고 배에 실려 더디게 가야 하는 사정을 정말 야속해 하신다.

그러며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룡천 구호성금 동참 여부에도 신경을 쓰신다. 그저 온 국민이 참여해서 구호품을 많이 보내 주게 되기를 바라시는 어머니께 한번은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 너무 그러시지 마세요. '가톨릭 굿 뉴스' 게시판 아시죠? 거기엘 들어가면요, 북한으로 구호품 보내는 걸 되게 못마땅허게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북한으로 구호품을 보내는 건 김정일을 도와주는 거라면서 얼마나 야단이라구요."

"아니, 지금 당장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일이 급허지, 거기에 김정일이를 왜 따져?"
"그 사람들이 어머니 얘길 들으면 어머니를 빨갱이 할망구라구 헐 걸요."
"아니, 지금 세상에두 빨갱이가 있다나?"
"빨갱이가 있어서 있남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맹글어 대니께 있는 거지유. 그 사람들 얘길 들으면요, 우리가 한시바삐 김정일을 몰아내지 않으면 기필코 김정일이헌테 먹혀서 적화통일이 되고 만대요. 룡천 참사 하나 땜에 온 나라가 난리를 떠는 것이 안타깝다는 말두 해요. 그런 게 다 나라 망할 징조라면서…. "

"원 세상에, 별 소릴 다 듣겄네."
"그게 다 '가톨릭 굿 뉴스' 게시판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람들이 허는 얘기예요."
"그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라구?"
"심지어는 룡천 참사를 보구 '하늘이 내린 저주'라구 헌 사람두 있어요."
"뭐, 저주? 그럼, 하느님이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라는 말여?"
"김정일의 죄 탓이라는 뜻이겄지유."
"아무리 김정일이가 밉다헤두 워떻게 그런 말을…."

그리고 어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거실에서 몸을 일으킨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서 촛불을 켜고 기도상 앞에 앉았다. 슬프고 혼란한 마음을 기도로 달래시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잠시 후 손에 묵주를 쥔 채 거실로 나오시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내게 말했다.

"북한 룡천의 그 일이 하늘이 내린 저주라면, 옛날에 이리역에서 생긴 그 일은 뭐라나? 그 일두 하늘이 내린 저주라나? 그 사람헌티 한번 물어봐. 이리역 사건두 하늘의 저주를 받아서 생긴 일이냐구…."

어머니의 그 말에 나는 잠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이미 말이 말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도 다 말이 되지 못할 터였다.

(3)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어머니는 밖에 나가 쑥을 캐신다. 백화산 기슭 아니면 적당한 밭둑들을 밟으며 쑥을 꽤 많이 뜯으셨을 것이다.

어제도 쑥을 한 자루 뜯어 가지고 오셔서 세 번이나 씻고, 삶은 다음에는 또 두 번을 씻으셨다. 그리고 저녁에 뒷동 동생이 와서 두 손으로 꽉꽉 짜서 덩어리로 만들어 드리니 일단 김치냉장고 안에 넣어두셨다.

안양 누님 집에도 보내고, 두고두고 쑥떡이나 쑥송편을 만들어서 우리도 먹고 여기저기에 선물을 하실 요량이었다.

팔순을 넘기신 연세에도, 노년에 네 번이나 수술대 위에 누우셨던 몸으로도 놀라운 기억력과 사리분별력을 유지하시며 쑥 욕심도 많아 어제도 오늘도 쑥을 캐오시는 어머니를 보면 은근히 걱정되면서도 감사한 마음 한량없다. 어머니에게서 하느님 은총의 실체를 보는 것만 같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어머니의 그런 모습에서보다도 어머니의 심성, 가령 조금 전에 쑥을 캐러 나가시면서 하신 한마디 말 안에 극명하게 집약되어 있을 것 같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쑥을 캐다가 쑥떡을 만들어 가지구, 북한 룡천의 그 다친 아이들에게두 보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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