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의 시대' 잔디 씨 따는 것도 숙제였다

하지 말라는 건 왜 그리 많고 가져오라는 건 또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등록 2004.05.20 07:54수정 2004.05.2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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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씨-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마당에서
잔디씨-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마당에서김규환

금기, 금지의 시대 학교에 가다


하지 말라는 것 투성이였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점심시간마다 쌀밥 한번 배터지게 먹고 싶은 학생들에게 “쌀밥만 싸오지 말고 혼식(混食)하라!” 원 없이 길러보길 원하던 아이들에게 등교하자마자 학생주임과 선도부원이 턱 교문 앞에서 지키고 있거나 조회 시간에 “머리를 3cm 이상 기르지 말라!”며 가위질을 해대는 두발검사를 실시했다.

살다보면 조금 비뚤어질 수도 있는 것을 “명찰과 배지 똑바로! 모자 삐딱하게 쓰지 말 것!”을 강요하고 한창 놀 아이들에게 권장은 못할망정 “교장 선생님 관사 옆에서 재기차지 마라!”고 한다.

사춘기 호시절에 “연애편지 쓰지 마라!”며 으름장을 놓고 가방까지 뒤지며 족치는 암울한 시대 “교실에서 떠들지 마라!” 등 귀가 따갑게 “하지 마라”, “하지 말라”를 들어가며 학교를 다녔으니 어서 커서 어른이 되고 싶은 맘 간절했다.

학교 다니기가 지옥에 온 듯하다던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실력차가 있고 관심사가 다른 것을 공부 못한다고 집에서도 모자라 학교에서 마저 사람 취급을 하질 않았으니 학교란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뿐이면 다행이었다. 간혹 이단발차기로 학생들 머리를 찍지를 않나 두꺼운 슬리퍼로 소위 대가리(?)를 수십 번 아작을 내는 못된 선생을 만날 때는 무슨 선생일까도 싶었다.

서오릉 잔디 밭
서오릉 잔디 밭김규환

갖고 오라는 건 왜 그리 많던지...


그런데 어릴 적 학교 다닐 때는 갖고 오라는 것도 많았다. 보리 벨 때나 방학 때는 퇴비를 늘린다며 풀 베러 나오라고 하는데 꼭 낫을 들고 오라 했다. 학기 초마다 채변봉투를 걷는 통에 심적 부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장작을 갖고 오라 하니 하교 후에는 산에 들러 등걸이라도 몇 개 뽑아서 집으로 가기도 했다.

그런데 하지 말라는 것과 갖고 오라는 일은 공통점이 있었다. 매가 동반된다는 것과 언제나 행동발달상황에 ‘가’, ‘나’, ‘다’를 고르는 잣대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나는 금지사항을 자주 어긴 죄로 준법정신이 ‘나’가 종종 등장했고 때론 ‘다’를 맞아 일찍이 반항아로 자리 잡았다.


특히 중 3때는 학년 말에 우등상을 받지 못할 위기에 있다가 구제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학업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행동발달상황이 ‘다’가 하나라도 있으면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적당히 하지 말라면 안 하면 간단하다. 순응하며 살면 되지만 왜 그리 사춘기 때는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았던 것일까. 하라면 하기가 싫어지고, 반대로 하지 말라면 꼭 규칙을 어겨 하고야 마는 내 심사는 청개구리 성질머리를 꼭 빼 닮았다.

커서도 “군대가라”는 주위의 압력에 어떻게든 빼볼 구실을 찾다가 결국엔 대학과 시골집에 헌병대까지 뜨던 날 마음이 바뀔까봐 수중에 있던 돈을 고스란히 털어 다니던 안암동 대학 앞에서 31사단이 있는 광주 훈련소까지 택시를 타고 내달려 처절하게 입대를 결심한 일도 있었다.

중학교 이후 나는 선생님 눈 밖에 나는 건 예사였고 선생님 대신 일을 처리하는 반장과 사이도 영 좋지 않았다. 떠들면 이름 적어내고 늦게 내거나 뒤에 처지면 또 이름이 적히는 악순환이었다. 그런 반장을 골탕 먹이는 선동과 행동을 일삼았던 내가 이제 어른이 되어 반평생을 살고 있다니.

요즘도 잔디 씨 따오라고 시키는지 모르겠네요.
요즘도 잔디 씨 따오라고 시키는지 모르겠네요.김규환

깜지와 일기쓰기를 거부하다

가져오라는 것 중에는 16절지 서너 장 양면을 까맣게 칠하듯 단어나 공식을 써오라는 ‘깜지’는 내 생애에서 한번도 하지 않았던 기록을 갖고 있다. 볼펜 세 자루 잡고 써내려가는 깜지는 정말 왜 내주는지 원…. 나는 깜지 하는 동안 다른 공부를 한 자라도 더 들여다보겠다는 뜻이었으니 그건 나름대로 반대의 명분을 갖고 있었다.

일기 쓰기는 또 얼마나 싫었던가. 학기 초에만 몇 번 충실히 쓰다가 선생님 관심이 떨어지면 서간문을 베껴 내던가, 물론 반대급부가 있었지만 친구에게 대신 써달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일기 쓰기마저 거부한 건 나름의 이유가 된다고 본다.

아무리 선생님이라 하더라도 어찌 타인의 일기를 볼 수 있는가 말이다. 말이 일기 검사지 사생활을 훔쳐보는 비인격적, 반인권적 행위와 다름없다고 보았다. 교육을 한다는 곳에서 스승과 제자라 할지라도 간섭할 것과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 뚜렷하다. 엄연히 지켜져야 할 원칙이 무너지는 건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

내 고향 화순군 북면 방리 일명 정지동의 아름다운 모습. 여기에서 모내기 하다 점심도 자주 먹었답니다.
내 고향 화순군 북면 방리 일명 정지동의 아름다운 모습. 여기에서 모내기 하다 점심도 자주 먹었답니다.김규환

또 하나의 숙제, 잔디 씨 훑어오기

봄이 무르익으면 또 한 가지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5월 중순쯤 선생님께서는 주말을 이용하여 꽤 시간을 허비하는 숙제를 내주셨다. 바로 잔디 씨를 훑어오라는 거다. 요즘에야 아무 공원 잔디밭에 가서 쭉쭉 훑으면 금방 해치울 하찮은 일이지만 어릴 적 우리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놀기에 바쁘기도 했거니와 방과 후 집으로 직행을 해야 했고, 도착하자마자 집안에서 할 몫이 정해져 있어 짬을 낼 겨를이 없었다. 잔디 씨가 여물기 전에 벌써 여러 번 꼴로 베어간 것도 한 가지 이유다. 논두렁 밭두렁엔 바랭이, 쑥만 무성할 뿐 잔디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친구 몇 명과 함께 ‘삐비’ 뽑아 먹었던 묘지에 가보지만 그 시절 우리 동네 묏동엔 요즘 나오는 키 작고 균일한 잔디가 심어져 있지 않았다. 밭가에 나는 고르지 않는 풀이 듬성듬성 심어졌을 뿐이었다.

뽑아오라는 분량도 만만치가 않았다. 편지 봉투에 가득 채워오라니 그 많은 것을 어느 세월에 다 채워간단 말인가. 토요일 오후 학생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야, 병문아 어디 좋은 데 없냐? 잔디 씨 딸 데 말야.”
“정지동(들 한 가운데에 있는 정씨들 묏동)에 있을 지도 몰라.”
“야 거기는 폴새 국민학생들이 다 따가부렀는디….”
“그래, 글면 우리 집에까지 걸어갈래?”
“가다보면 있을라나?”
“글도 한 귀탱이는 남아 있지 않겠냐?”
“카만 있어봐봐. 거기 어디냐 원리마을 못 가서 새로 쓴 묏동이 몇 개 보이던디.”

맘에 드는 녀석들끼리만 근 20리 길을 걷기로 했다. 초등학교 동창 여학생도 몇 명 끼었다.

“야 규환아, 우리 꺼도 해줄 거지?”
“있으면 해줘야지.”
“병문아 너는 누구 꺼부터 할테여?”
“몰라. 그건 그렇고 영임아 나 소개시켜 계집애 어찌코롬 돼가냐?”
“내가 말은 해놨응께 쬐끔만 기다려봐.”

잔디 씨 따는 건 까마득히 잊고 남녀간 애정문제로 화제가 바뀌었다. 그러면서 남자들은 여자애들 블라우스 밖에서 연결 지점을 찾아 브래지어 고리를 주먹으로 툭툭 치기도 하고 쭈욱 늘였다가 갑자기 놔버려 사정없이 퉁기게 한다.

“야! 가만 안 둬! 워메 아픈 거.”
“아따 꼬시다.”
“이러면 정말 여자 소개 안 시켜준다.”
“알았어. 앞으로 안 그럴게.”

아카시아 꽃을 배고픈 시절 요렇게 꽃자루가 선명하여 덜 피었을 때 무던히도 따먹었습니다.
아카시아 꽃을 배고픈 시절 요렇게 꽃자루가 선명하여 덜 피었을 때 무던히도 따먹었습니다.김규환

토요일 오후 20리 길을 걸어도 잔디 찾기 힘들었다

3km를 걸어도 잔디가 있을만한 곳을 찾지 못했다. 중간 조금 못 미쳐 원리마을 한 가정집에서는 어금니마저 깨질 정도로 꽝꽝한 고구마과자(밀가루를 두껍게 튀겨낸 불량식품의 하나)를 판다. 100원이면 아이 손바닥만한 크기의 과자를 숫자를 꼬박꼬박 세어서 열 한 개씩을 준다. 주말이면 그 과자 먹는 재미로 늘 즐겨 걷곤 했다.

양 볼은 물론이고 이가 무척 아프지만 시장기가 극에 달해 고소함까지 더하니 먹을 만했다. 줄곧 내려오다 마을 쪽으로 향하는 십리 길은 오르막길에다 길이 좁아진다. 찻길 양쪽으로 심어진 아카시아 달콤한 향기까지 씹혔다. 지금부터는 누구네 묘가 어디쯤 있는지 훤히 알고 있지만 더 이상 구할 데가 없다.

“야 니기들 어떡할 거여?”
“나도 몰러. 정 없으면 상추씨에다 까만 물감 덧씌워서 가져갈까?”
“안돼야. 우리 선생님은 과학 선생님이랑께. 귀신이셔.”
“하기야 배복성(본명은 배성복 선생님인데 재미로 배와 복성-복숭아를 합쳐서 놀림으로 불렀다)은 그렇기도 하겠다.”

더 걷다보니 목이 말라온다. 아카시아 꽃을 훑어먹고 까맣게 익은 오디를 몇 개 따 먹어보아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다리를 건너고 고구마처럼 액포(液胞)가 툭툭 터져 나오는 느티나무를 지나면 하얀 모래가 솟았다 가라앉았다 반복하는 옹달샘이 하나 있다.

“야 물이나 한번 빨고 가자.”
“그려.”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소 물 마시듯 “쪽쪽” 빨아댔다.

“어~ 시원허다. 니기도 언넝 묵어라. 여자애들은 손으로 떠서 먹어. 알았지?”
“안돼야. 누구 도시락 뚜껑이라도 좀 줘봐.”
“김치 냄새 풀풀 나는 벤또를 뭐 할라고 열라고 그래? 손으로 떠먹으라니까.”

몇 번 종용을 해서 여학생들까지 물을 실컷 들이켰다. 냇가 바위 위에는 물총새가 방금 잡아 올린 어름치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쉬고 있었다.

오디가 맛있는 계절입니다. 들로 나가보시죠.
오디가 맛있는 계절입니다. 들로 나가보시죠.김규환

정지동에서 조금 따고 꼴 베다가도 훑어 훅 털어 담았지

얼마를 또 걸었을까. 송단마을을 지나 삼거리에서 우린 찰떡 같은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야 병문아 규환아. 여기 봉투.”
“야아 장담은 못 한당께.”
“해섭이도. 그래도 니기들이 더 낫제.”
“원메 요것들이 떠안기는 구만. 하여튼 찾아는 볼 것이여.”

대부분의 아이들과 헤어지고 양지 마을 아이들만 더 좁다란 길로 접어들었다. 제 것은 늘 작아 보이고 하찮듯 우린 같은 마을 여자애들과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 두 곳의 너럭바위를 지나니 곧 마을에 안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팽개치듯 마루에 던져놓고 우린 행여 있을지 모르는 잔디 씨를 찾아 정지동으로 향했다. 새끼 한 마리 딸린 암수 학(鶴)이 한가로이 먹이를 찾는 듯한 모양새를 빼닮은 세 그루의 노송(老松) 아래 250여 평 펼쳐진 묘지를 벌써 몇몇이 다녀간 듯하다. 촘촘히 심어진 잔디가 밟힌 자국이 있고 씨는 별로 없어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른데 가봐야 잔디 구경을 할 수 없으니 죽치고 앉아 훑어 담았다.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즐거운 일이었다. 한 손으로 아랫부분이 빠지지 않게 잡고 까만 씨를 손톱으로 대롱 끝까지 쭈욱 따내는 기분은 무척 좋았다. 반쯤 담고 그 다음날 꼴 베러 갈 때도 주머니에 넣어서 조금씩 채워 나갔다.

월요일에 우린 선생님이 잠시 한눈을 팔고 반장이 대신하던 순간 잽싸게 달려나가 훅 털어 넣고 돌아왔다. 그렇게 우린 늘 임무를 완수하곤 했다. 전국에서 걷었던 그 많은 잔디 씨는 다 어디로 갔을까? 수출했을까? 골프장 러프(rough)에 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잔디는 우리 삶을 넉넉하게 합니다.
잔디는 우리 삶을 넉넉하게 합니다.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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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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