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초대'에 의한 삶을 함께 나누며

등록 2004.05.20 08:12수정 2004.05.21 01:0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이 40에 결혼하여 그해(정확히 11개월만에)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조물주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내 손으로는 머리카락 한올도 만들 수가 없는데, 나와 아내의 일치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하고 고마웠다.


사람이 결혼하면 아이가 태어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왜 그리도 많은 생각들을 갖게 하는지 몰랐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아이는 자신의 뜻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본인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조물주가 태초에 마련해 놓은 신비한 '섭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가족'이라는 조물주의 선물

그 위대한 섭리를 이미 무시할 수 없는 한 나는 그 섭리를 더욱 적극적으로 살피는 자세로 내 아이의 출생의 의미를 생각해야 했다. 비록 자신이 이 세상을 선택한 것은 아니더라도, 조물주의 섭리의 작용으로 태어났다면, 그건 그냥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신의 초대'에 의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은 내 아이의 출생 또한 신의 초대에 의한 것임을 아이가 자라서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함을, 다시 말해 그 역할이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몫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 아이를 초대받은 생명으로 키우고, 궁극적으로 초대받은 삶이 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참된 아버지의 몫일 터였다.


아내는 직장에 매인 몸이고 나는 자유직업인인 고로 첫아이와 둘째 아이 모두 갓 낳았을 때부터 내가 돌보아주는 시간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좀더 모유를 많이 먹이려고 애를 썼다. 첫아이 때는 점심 시간마다 아내를 자전거로 태워와서 젖을 물리게 했다. 둘째 아이 때는 차를 장만한 덕에 하루에 두세 번씩 아이를 태우고 학교에 가서 엄마 젖을 먹일 수가 있었다.

아이들이 눈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거실에 촛불을 켜놓고 아빠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젖병을 물려줄 때도 나는 의도적으로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읽었다. 아이들의 뇌리에 아주 일찍부터 아빠의 책 읽는 모습, 그 영상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지난해부터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모시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덕을 보며 사니 그저 어머니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 아이들은 젖을 뗀 다음부터는 할머니 방에서 잠을 잤다. 때로는 할머니의 젖꼭지를 물기도 하고, 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누나보다 좀더 오래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잠을 자던 아들녀석도 간혹 밤에 배가 아플 때는 할머니에게로 가서 할머니의 약손에 의해 해결을 보곤 하더니, 할머니와 자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올해 중2인 아들녀석은 엄마보다도 할머니 손에 더 많이 의존하며 생활한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는 할머니부터 찾고, 칭찬도 꾸중도 엄마 아빠보다 할머니에게서 더 많이 듣는다.

내가 아이들을 일찍부터 할머니 방에서 자게 한 것은 할머니의 '새벽 기도'의 기운 속에 아이들을 오래 머물게 하려는 의도였다. 할머니가 새벽마다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하시니, 아이들이 간혹 일찍 잠을 깨기라도 한다면 할머니의 새벽 촛불을 볼 수 있을 터였다. 할머니의 새벽 촛불과 손에 쥔 묵주는 아이들의 뇌리에 평생 동안 할머니를 잊지 못하는 영상으로 자리잡을 것이었다.

지난해 천안으로 고교 진학을 해서 너무 이른 나이에 가족 품을 떠나 자취생활을 하는 딸아이에 대한 걱정을 엄마 아빠보다도 할머니가 더 많이 하신다. 노상 아이를 안쓰러워하시며 밑반찬 한가지라도 더 만들어 보내 주려고 애를 쓰신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 나도 어지간히 복이 많지만 내 아이들은 정말 복이 많은 아이들이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가족과의 추억, 평생 가슴에 남아

일찍부터 내 아이들에게 재산 물려주는 것은 포기했다. 원래부터 물욕도 이재 능력도 없는 데다가 땅 한 평 갖지 못하고 겨우 집 한 채가 전 재산이니 아이들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물질적인 재산은 물려주지 못하는 대신 정신적인 재산은 많이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것의 요체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물론이고 사촌들까지, 우리 삼형제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시간을 힘껏 마련하는 일이었다.

우리 아이들처럼 사촌들이 자주 만나고 정답게 지내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내 아이들만큼 할머니와의 추억을 많이 만들며 사는 아이들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나와 내 누님처럼 남매의 정을 평생 동안 잘 유지하며 살 것으로 생각한다. 가족과 함께 한 아기자기한 일들이 많으므로, 가족 간의 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잘 지니게 됨으로써 그것이 평생 동안 좋은 작용을 낳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며 사는 것을,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하며 올바른 삶의 길을 내 생활로 가르쳐주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평생 동안 간직하게 될 소년 시절의 기억 속에 할머니가 별빛처럼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을 더욱 큰 다행으로 생각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추석 앞두고 날아드는 문자, 서글픕니다
  2. 2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5번이나 울었다...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는 영화"
  3. 3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개 안고 나온 윤 대통령 부부에 누리꾼들 '버럭', 왜?
  4. 4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추석 민심 물으니... "김여사가 문제" "경상도 부모님도 돌아서"
  5. 5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계급장 떼고 도피한 지휘관, 국군이 저지른 참담한 패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