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는 우째 그리도 일이 잘 풀리노"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65> 공장일기<38>

등록 2004.06.10 15:28수정 2004.06.1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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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가 근무했던 공장 운동장에서(왼쪽이 나)

내가 근무했던 공장 운동장에서(왼쪽이 나) ⓒ 이종찬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네. 우떤(어떤) 넘은 쎄(혀) 빠지게 일을 해도 맨날 요지경 속인데, 니는 우째 그리도 일이 잘 풀리노. 우는 아(아이)한테 떡 하나 더 준다는 긴가?"


"몰라. 이래 놓고 날 아예 잡아 묵으라꼬 그라는지도 모르지."

"하기사(하긴) 사형수도 죽기 직전에는 아주 맛있는 반찬이 나온다 안 카더나."


창원공단에서 공장생활을 시작한지 7년째에 접어드는 그 해, 그러니까 1984년 1월부터 나는 1년 남짓 일했던 조립부를 뒤로 하고 다시 사출실로 부서이동을 했다. 게다가 창원공장 사보기자로까지 발령이 났으니, 나로서는 아닌 밤중에 양 날개까지 단 셈이었다.

그 당시 주변 동료들은 모두 나를 몹시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출실은 출입통제구역이어서 공장장의 결재를 맡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 간혹 사출실에 업무가 있어 공장장의 출입허가를 맡았다 하더라도 미리 업무연락서를 보내 한번 더 내 허가를 얻어야만 했다.

특히 사보기자는 직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으며, 부서의 특수성에 상관없이 수시로 들락거릴 수도 있었다. 그 대신 반드시 한 달에 1꼭지 이상의 기사를 써야만 했다. 기사의 소재는 자유였으나 주로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미담이나 생산성 향상과 관련된 그런 내용을 다루게 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사보기자지, 정해진 업무시간에는 그 누구에 대한 취재나 인터뷰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려온 사보기자 규약에 따르면 사보기자가 취재나 인터뷰를 하는 시간은 공장장의 허가를 받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점심시간이나 퇴근시간을 이용하도록 못 박혀 있었다.


사출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사출실로 갔을 때 사출실 여성노동자들은 모두 다른 부서에 파견을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사출실에서 생산하던 벽시계가 판매가 부진하다는 이유로 아예 중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한때 사출실에서 같이 일했던 그 여성노동자들은 소속만 사출실이었을 뿐이었다.

그랬다. 공장장이 나를 그 바쁜 조립부에서 사출실로 다시 보낸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값을 엄청나게 주고 구입한 일본산 사출기와 정밀도 1000분의 2~3을 자랑하는 사출금형의 관리였다. 사출기는 제품을 생산하지 않아도 하루에 1~2번씩은 반드시 공회전을 시켜주어야만 기계의 성능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있었다. 사출금형 또한 수시로 분해를 해서 녹이 슬지 않도록 기름칠을 해 주어야만 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제품의 개발에 따른 시험생산이었다. 새로운 제품의 시험생산을 하기 위한 사출금형 셋팅과 사출기 조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창원공장에서는 유일하게 나 혼자뿐이었다. 사출실 소속의 숙련된 여성노동자들도 제법 있었지만 제품 생산만 할 줄 알았지, 사출금형 셋팅과 사출기의 조작은 할 줄 몰랐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해야만 했다. 간혹 새로운 제품을 계속해서 시험생산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미리 업무연락서를 생산부장에게 보내 다른 부서에 파견을 나간 사출실 여성노동자를 데리고 와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험제품 생산은 거의 다 나 혼자서 처리했다.

"그래, 요즈음 어때?"

"고맙십니더."

"곧 사출실 프로젝트 팀장으로 발령이 날 거야. 그러니까 그동안 찍 소리 하지 말고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고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하여튼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맙십니더. 제가 이 은혜로 우째 갚아야 될 지 잘 모르겠심니더."

"은혜는 무슨?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있는 것이 은혜를 갚는 지름길이야."


그랬다. 그 모든 일은 공작부 황복현 과장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제품의 시험생산을 위한 사출금형을 공작부에서 만들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사출실에서 새로운 제품의 시험생산뿐만 아니라 새롭게 만든 사출금형의 사출기 적응 여부에 따른 시험까지 맡았던 것이다.

근데 그 사출금형 제작을 공작부 황복현 과장이 맡고 있었다. 당시 황 과장은 남 모르게 나의 문학활동을 도우며 시를 쓰고 있었다. 전북 익산인가가 고향이었던 황 과장은 시를 참 잘 썼다. 황 과장의 시는 주로 민중들의 아픔을 다룬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등단만 하지 않았을 뿐 정말 뛰어난 민중시인이었다.

나는 그런 황복현 과장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떨치기 위함이 아니며, 돈을 많이 벌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황복현 과장에게서 배웠다. 황 과장은 늘 시는 자신과 동료들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현실을 떠난 시는 죽은 시라고 강조했다.

"이 팀장! 그때 말이야, 만약 자네가 <마산문화> 3집에 시를 발표했더라면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마산문화>에 시를 발표하더라도 필명을 쓰도록 해. 쥐가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두어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더. 근데 왜 그동안 그런 기막힌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강 잘 모르겠네예. 하여튼 고맙십니더."


사출실로 옮긴 뒤부터 내 마음은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보기자와 사출실 프로젝트 팀장까지 맡은 나는 그때부터 차분히 창원공단이 형성되는 과정과 주변 동료들의 공장생활을 담은 시들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가 내 8년 동안의 창원공단 공장생활 중 가장 행복한 때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몇 해 전
풀뿌리 캐먹으며 줄줄이 자빠지던
그 험한 보릿고개에도 끄떡없이
피 붙히며 살았다
오랜만의 풍년농사 잘 끝내고
밀려오던 빚도 좀 갚아 든든했다
그런데 이 외진 문둥이 땅에도
조국근대화의 물결은 어김없이 밀려왔다
대대로 이 마을 노인들 죽을 자리 보던
앞산 뒷산
불도저로 겁없이 마구 깎아
조상뼈 묻힌 산 흙으로
벼들이 아야 아야 소리치는
기름진 논들을 장난처럼 처억처억 덮었다
검은 하늘에선 마른 번개가 치고
때 이른 싸락눈이 하얗게 내리 꽂히는 데도
불도저의 날카로운 삽날은
무디어갈 줄 몰랐다

(이소리, '밀리는 고향'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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