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고매는 운제 심노"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64> "무강고매"

등록 2004.06.07 14:30수정 2004.06.0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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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들이 '무강고매'라 불렀던 씨고구마

우리들이 '무강고매'라 불렀던 씨고구마 ⓒ 이종찬

해마다 오뉴월에 접어 들면 내 고향집 뒷마당에는 이른 봄에 심어 두었던 씨고구마가 줄기를 쭉쭉 내밀며 실뱀처럼 텃밭을 기어다녔다. 그와 더불어 그 고구마 줄기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하트 모양의 고구마 잎사귀가 하늘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청개구리들의 우산처럼 촘촘히 매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 때쯤이면 달착지근하고도 맛있는 고구마순을 조금 솎아내어도 별다른 표시가 나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머니께서는 고구마순을 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씨고구마에서 뻗어나온 그 고구마순은 따서 나물을 해 먹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간격으로 줄기째 잘라 '날끝'에 있는 밭에 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날끝? 그래. 그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앞산의 해가 잘 드는 쪽을 '앞산가새', 그 앞산의 뒤 쪽 응달진 곳을 '날끝'이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마을 사람들은 고추와 배추, 상치 등은 앞산가새에 일군 다랑이밭에 심었고, 씨고구마에서 자란 고구마 줄기는 날끝에 있는 다랑이밭에 심었다.

"우리집 고매(고구마)는 운제(언제) 심노?"
"와? 갑자기 고매가 묵고 싶나?"
"고매뿐만 아이라 고매 쭐구지 무침도 묵고 싶다."
"쪼매마 더 기다려 봐라. 운젠가는(언젠가는) 비가 오것지."


고구마 줄기 파종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께서는 씨고구마에서 뻗어나온 줄기가 뒷마당 텃밭을 아무리 촘촘하게 덮어도 날씨가 쨍쨍한 날은 고구마 줄기를 자를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a 고구마는 씨고구마에서 자란 줄기를 잘라 심는다

고구마는 씨고구마에서 자란 줄기를 잘라 심는다 ⓒ 이종찬

a 씨고구마를 캐다보면 새끼고구마도 몇 개씩 나온다

씨고구마를 캐다보면 새끼고구마도 몇 개씩 나온다 ⓒ 이종찬

어머니께서는 고구마 파종을 할 시기가 지나 고구마 순이 너무 웃자랐다 심으면 그때서야 고구마순을 조금 솎아냈다. 그리고 그 고구마순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맛있는 고구마나물을 무쳐 주기도 했고, 아기 손바닥만한 고구마 잎사귀는 밥솥에 삶아 쌈을 싸 먹게 하기도 했다.


고구마순은 잎사귀와 함께 통째로 삶아 장독대에서 금방 퍼낸 된장을 약간 넣고 갖은 양념을 넣은 뒤 참기름 한방울을 톡 떨어뜨려 버무려 먹어도 맛이 좋았다. 그리고 조금 거칠어진 잎사귀를 떼낸 뒤 고구마순의 껍질을 벗겨 삶은 물에 데쳐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먹어도 참 맛이 좋았다.

그래, 아마 그때가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가. 그날도 오늘처럼 아침부터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 우산이 없어 어머니와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비를 줄줄 맞고 학교에 갔던가.


"올(오늘)은 핵교(학교) 갔다가 오데(어디) 가지 말고 퍼뜩 집으로 온나."
"와예?"
"올은 비도 부슬부슬 오는 기 고매 쭐구지(줄기) 숭구기(심기) 딱 좋은 날 아이가. 고매 쭐구지는 올 겉은(같은) 날 숭구야 안 죽고 잘 산다카이."
"그라모 오늘 새끼 고매도 묵을(먹을) 수 있것네예?"
"그걸 말이라꼬 하나. 그리고 너거들이 좋아하는 고매 나물도 실컷 묵을 수 있을 끼다."


그랬다. 나의 부모님께서는 날씨가 몹시 흐려 비가 올 조짐이 보이거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 되어야 씨고구마 줄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그날 오후, 아버지께서는 우선 씨고구마에서 뻗어 나온 고구마 줄기의 밑둥를 잘라 마루 위에 수북히 올려 놓았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가위를 들고 그 고구마 줄기를 두세마디 간격으로 잘라 가지런하게 놓았다.

a 모종을 갓 심은 고구마

모종을 갓 심은 고구마 ⓒ 이종찬

a 고구마 모종은 주로 비가 오는 날 심는다

고구마 모종은 주로 비가 오는 날 심는다 ⓒ 이종찬

"야가(얘가) 야가! 공부로(공부를) 무강고매(무강고구마) 새끼 찾듯이 좀 해라. 그라모 금방 너거 핵교에서 일등을 차지할 끼다."
"체! 옴마(엄마)는 맨날 공부 타령만 하나. 그런 옴마는 어릴 때 와 공부로 안 했는데?"
"야가 야가! 호강하는(잘 먹고 잘 사는) 소리 하고 있네. 그때는 핵교에 댕기고(다니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댕길 수가 없었다카이."


아버지께서 그렇게 고구마 줄기를 다 자르고 나면 우리들은 텃밭에 들어가 호미로 씨고구마를 캐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무강고매'(한물 간 고구마)라고 부르는 씨고구마 주변을 열심히 호미로 파다 보면 가끔 어른 손가락만한 굵기의 바알간 새끼 고구마가 몇 개씩 나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들이 무강고매를 열심히 캤던 까닭은 바로 그 빨간 새끼 고구마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씨고구마는 껍질을 벗겨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도 뻥튀기처럼 푸석거리는 게 맛이 별로 없어 소 여물통에 던졌지만 새끼 고구마는 삶아 먹으면 속이 쌀가루처럼 하얀 게 군밤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옴마!"
"와 또?"
"올 저녁에 고매 쭐구지 무칠끼제?"
"씰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고매 쭐구지나 퍼뜩 심거라. 이라다가(이러다가) 어두버(어두워)지것다."


날끝에 있는 우리 밭에 고구마 줄기를 심는 날은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날은 소를 먹이거나 소풀을 베지 않아도 되었고, 어머니께서 중참으로 맛있는 새끼 고구마를 삶아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날 저녁은 고구마순을 버무린 맛있는 나물에다 꽁보리밥을 쓱쓱 비벼 먹을 수도 있었다.

a 잘 자라고 있는 고구마 모종

잘 자라고 있는 고구마 모종 ⓒ 이종찬

"아나!"
"옴마야! 이기 뭐꼬? 고매 아이가. 고매가 나는 철도 아인데(아닌데), 이 귀한 기 오데서 났더노?"
"아까 우리집 텃밭에 있는 무강고매로 캤다 아이가. 밤보다 더 달다. 그렇다꼬 급히 묵다가 언치지(목에 걸리지) 말고."
"고맙다. 내 생각하는 거는 니뿐이다."


그래. 해마다 이맘 때면 우리집 뒷마당에 일군 텃밭을 빼곡히 기어다니던 그 싱싱한 고구마 줄기가 생각난다. 그리고 이게 웬 떡이냐는 듯이 큰 눈을 껌뻑거리며 무강고매를 맛있게 부숴먹던 우리집 암소와 그 무강고매가 낳은 빨간 새끼 고구마를 들고 눈웃음 툭툭 던지던 탱자나무집 그 가시나가 못 견디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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