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그냥 가게 내버려둬, 엄마!"

연극 속의 노년(11) - 〈잘자요, 엄마〉

등록 2004.06.11 14:04수정 2004.06.1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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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잘자요, 엄마>

<잘자요, 엄마>

친구들과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대형 할인 마트에 놀러 갔다 온 중학교 1학년 큰 아이의 손에는 매니큐어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투명한 것이었고, 하나는 작은 반짝이 별들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학교에 바르고 가겠다는 아이와 주말에 집에서만 바르라는 나의 입씨름이 지겹도록 이어졌다. 결국 나의 성냄과 아이의 눈물 바람으로 싸움은 막을 내렸고, 매니큐어는 서로에게 하나도 즐겁지 않은 물건이 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난 다음 아이가 "엄마, 매니큐어 발라 드릴까요?"하고 덤덤하게 묻길래, 기다렸다는 듯 바르고 싶다고 얼른 대답했다. 모녀가 이렇게 슬쩍 화해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서로 매니큐어를 바르고 칠할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손을 깨끗이 씻고 편안하게 매니큐어를 바를 수 있는 시간이면 아이가 숙제를 하는 중이었고, 아이가 발라 줄 준비가 되면 내가 무슨 일인가를 하느라 또 분주했다. 덕분에 말 없는 매니큐어만 아이 책상 위에 오도카니 올라 앉아 뚜껑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연극 <잘자요, 엄마>에서도 엄마는 딸 제씨가 매니큐어를 발라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제씨는 분주하게 집안 일을 하면서, 조금 있다가 매니큐어를 발라 주겠다며 엄마더러 손 깨끗이 씻고 잘 말리고 있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제씨는 다락방에 올라가 아버지가 쓰던 낡은 권총을 찾아와서는 엄마에게 무심한 듯 내뱉는다. 이 총으로 오늘 밤 자살하겠노라고. 처음에 엄마는 믿지 않는다. 엄마와 딸의 대화는 엇나가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그러면서 모녀간의 이야기와 가족의 이야기가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간질 발작 증세가 있는 제씨. 병을 이유로 딸을 자기 품안에서만 기른 엄마는, 세상에 깊이 생각할 게 뭐 있느냐며 자신은 그저 주어지는 대로 하루 하루 살 뿐이라고 말한다.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엄마는 딸까지도 자기 마음대로다. 엄마에게 딸 제씨는 독립된 인격을 가진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자기 소유물이다.


자신의 생에 지칠 대로 지친 딸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엄마가 걱정돼, 자신이 죽고 나서 당분간만이라도 엄마가 불편 없이 살도록 집안 청소며 물건 정리, 식료품 주문을 다 끝내 놓는다.

죽기 전에 엄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딸. 시간이 흐르면서 딸의 자살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깨달은 엄마는 딸의 마음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돌려 보려고 애쓰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자기 중심의 언어를 구사할 뿐이다.


딸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필요한 엄마의 행동 지침까지 일러 준다. 거기에는 장례식은 물론이고, 조문객에게 할 말, 장례 이후의 손님 초대도 들어 있다. 기막혀 하면서도 엄마는 새겨 듣는다. 이미 딸은 여기 있지 않고 저쪽으로 건너가 버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만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여기에 자신을 붙들어 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이제 그만 생(生)이라는 이름의 버스에서 내리고 싶다는 딸. 이런 딸의 죽음을 말리면서 야단치고 부탁하고 화내고 울고… 그러면서 엄마는 소리지른다. 자기는 여기가 좋다고, 여기서 악착 같이 살겠다고.

딸은 자신이 정한 죽음의 시간에 쫓겨 끝내 엄마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해 주지 못한 채, "잘자요, 엄마!" 인사를 한다. 문 저쪽에서 한 방의 총성이 울리고, 문 이쪽에서 엄마는 울부짖는다. 평생을 옆에 있었으면서도 딸의 외로움을 몰랐다고, 그리고는 통한의 고백을 한다. "네가 내 껀줄 알았다"고.

사랑하는 상대를 그대로 놓아 두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날 그냥 가게 내버려 둬, 엄마!" 연극 속 제씨는 삶의 마지막에서 엄마에게 이 말을 했지만, 지금도 많은 자식들이 삶의 한가운데에 서서 자신을 그냥 좀 내버려둬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부모는 놓아줄 줄 몰라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딸 제씨의 죽음에 몰입해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 방식으로만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노년에 접어든 엄마는 전혀 성숙하지 않다. 딸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죽은 남편에 대한 생각 등 자기 중심의 삶은 노년을 너무도 보잘것없게 만들었다.

자식의 인생을 마구 휘저으며 살아온 엄마는 노년의 인간적인 성장과 성숙은커녕, 딸의 자살이라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담한 고통을 맛봐야 했다. 자기를 들여다 보며 살아가는 일, 상대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의 무게가 새삼 무거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긴장이 느슨해졌다 팽팽해졌다 하면서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연출의 묘미와 실제 모녀인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에 푹 빠졌다 정신을 차리니, 나의 엄마가 그리고 내 딸의 엄마인 내 모습이 저절로 눈에 들어 왔다. 제씨의 아픈 선택과 엄마의 뒤늦은 후회에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인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한 가지 때문이었으리라. 존재는 소유가 아닌 것을….

연극이 끝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와, 엄마를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고 있는 딸아이에게 깨끗이 씻은 손을 내밀고 매니큐어를 부탁했다. 아이는 씩 웃으며 손톱에 별이 한 두 개씩 들어가도록 온 정성을 다해 매니큐어를 칠해 주었다. 지금도 내 손톱에서는 비록 울퉁불퉁하기는 하지만 별이 반짝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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