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시원해? 난 행복해!"

도서관에 놀러오는 아이들에게 시를 읽어 주었습니다

등록 2004.06.19 09:11수정 2004.06.1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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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자주 '놀러오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도서관에 와서 책을 읽거나 빌리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잡담이나 나누다 가는 것이 고작이니 그야말로 놀러온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아이들입니다. 저는 그런 아이들을 나무라기는커녕 늘 반갑게 대해 줍니다. 아이들이 도서관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제가 바라는 바이기 때문이지요.

책을 보러 오지 않고 놀러온 아이들 때문에 도서관이 좀 떠들썩하긴 합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평소와는 달리 소파 있는 쪽이 조용했습니다. 아이들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가서 확인해 보니 다섯 명의 말만한 여학생들이 서로 엉켜 몸을 기댄 채 곤한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5교시가 시작하려면 7분 가량 남아 있더군요. 좀 더 자도록 내버려둘 요량으로 조심스럽게 뒷걸음을 치려는데 한 아이와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부스스 잠에서 깬 그 아이는 제가 말릴 새도 없이 옆에 있는 동무들을 깨웠습니다. 잠시 후 잠에서 깬 아이들의 이마에는 이슬처럼 땀방울이 흥건하게 맺혀 있었습니다.

날은 덥지만 냉방 장치를 가동시키기에는 조금 더 기다려야할 것 같은 그런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이 꼭 그랬습니다. 잠에서 깬 아이들의 몸과 얼굴 표정에서 더운 열기가 느껴지는 순간, 제 눈은 도서실 잡지 서가 위에 놓인 어떤 사물에 가서 꽂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제 손에는 가로 두 뼘 남짓, 세로 세 뼘 남짓한 액자가 들려 있었습니다.

"자, 그대로 앉아 봐. 선생님이 이걸로 좀 부쳐 줄게."

바람을 만들기로 하자면 나무로 만든 액자가 부채보다 열 갑절은 더 위력이 있다는 사실을 제가 이미 알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 앞에서 다섯 명의 말만한 여자아이들이 마치 바닷바람을 쐬기라도 하듯이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부여 잡고 거의 경이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 광경은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통쾌함 그 자체였습니다.

"아! 정말 시원하다."
"선생님, 됐어요."
"주세요, 저희들이 해 드릴게요."


이런 말들이 귀에 들려왔지만 저는 차마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코 노동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작은 수고가 한순간이나마 다섯 명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기쁘고 상쾌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더없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너 시원해? 난 행복해!"


제발 사양하지 말고 1분간만 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어 달라고 통사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은 나무 액자가 만들어 내는 바람도 바람이었지만, 그것을 들고 설쳐대는 조금은 엉뚱한 저의 행동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듯했습니다.

"선생님, 이제 그만하세요. 정말 시원했어요. 고마워요."
"난 부채야.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즐겨. 딱 1분만 더 하자."

제가 아이들 앞에서 부채질을 한 시간을 시계를 놓고 정확하게 잰다면 아마도 채 1분이 못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느낀 심리적 시간은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이의 아이들답게 조금은 가볍고 퉁명스런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곤 했던 아이들이었는데 이런 구석이 있었나 싶게 아이들의 눈 속에서 깊고 따스한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 표정에 고무되어서 그랬는지, 저는 손에 들고 있던 액자 부채를 본래의 용도로 돌아오게 하여 아이들에게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거 말이야, 사실은 선생님 시야. '마음'이란 제목의 시인데 한 번 들어 볼래?"
"네. 선생님!"

다섯 명의 아이들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대답이 나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학교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게 되어 버린, 앞으로도 교단에서 다시는 보기 어려울 것으로 은근히 생각했던 아이들의 호기심에 찬 황홀한 눈빛이 느껴졌습니다.

"오 년 전쯤일 거야. 누가 풀밭을 제초기로 밀었는데 딱 한 곳만 동그랗게 남겨둔 거 있지. 그곳에 들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는데 꽃이 노란 색이었어. 마치 갓난아기 설사 색깔 같은. 그걸 보고 쓴 시야. 자, 읽는다."

마음

a 잠시 부채 노릇을 해 준 액자

잠시 부채 노릇을 해 준 액자 ⓒ 안준철

누가 남겨두었을까?

제초기의 무자비한 칼날을
차마 대지 못하고
동그랗게 남겨놓은 자리에
아무 근심 없이 피어 있는
들꽃 한 송이

재어보니
키는 한 뼘 반,
아기 설사 색깔 나는
노란 색 이파리 넉 장

누구일까?
동그란 마음을 가진 그 사람

모르면 몰라도
노오란 설사똥을 자주 갈겨대는
갓난아기를 키우는 사람이지 싶다.


시를 끝까지 한달음에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언제나 도중에 끊었다가 주위를 환기시키고 다시 읽든지, 아니면 아예 읽기를 포기하고 마는 것이 그 동안의 관례였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마지막 연을 낭송할 무렵에는 아이들의 입에서 "와~"하는 탄성까지 들려왔습니다.

"선생님, 시 너무 좋아요."
"그래? 어디가 좋은데?"
"마지막 부분요."
"바로 그 대목 때문에 시가 된 거야. 어때, 시가 어렵지 않지?"
"예, 선생님. 시는 쉬우면서도 감동적이에요."
"쉬우면서도 감동적인 것이 아니라 쉬우니까 감동적인 거야."

바로 그때, 아쉽게도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선생님 저희들 갈게요."
"그래. 책 안 읽어도 좋으니까 자주 놀러와."
"아니에요. 앞으로는 책도 읽을 거예요."
"왜 책과 친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니?"
"예. 그럼 안녕히 계세요."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도서관을 나간 뒤에 저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장담하건대, 그 날 저를 감동먹인 다섯 명의 아이들은 빳빳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에 눈을 번쩍였으면 번쩍였지, 시 나부랭이나 읊어대는 선생에게 눈길을 줄 아이들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이들을 바꾸어 놓은 것일까? 그리고 그 동안 나는 왜 아이들 앞에서 시 한 편을 제대로 낭송할 수 없었던 것일까? 나에게 무엇이 문제였을까?'

저는 다음 수업을 준비하면서 그 숙제를 열심히 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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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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