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대놀이 77

여인의 음모

등록 2004.07.05 08:48수정 2004.07.0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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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향이는 제게 그런 기생이 아닙니다!"

평소 같았으면 키다리 땡추 앞에서 함부로 고개도 못들 강석배였지만 지금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였다. 키다리 땡추는 난처한 표정을 얼굴에서 싹 지우고 호통을 쳤다.


"대업을 이루려는 것인데 사내가 어찌 계집 하나에 연연한단 말인가! 게다가 남정네들에게 붙어먹을 대로 붙어먹은 기생년이 아니던가! 다신 애향이 얘기를 말게!"

강석배는 부르르 떨리도록 주먹을 꾹 쥐었다가 체념 한 듯 고개를 푹 숙이며 키다리 땡추 앞에서 물러섰다.

다음날, 새벽밥을 지어먹고 키다리 땡추의 부하 두 명과 강석배, 애향이 그리고 동자승은 불암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뜻밖의 상황에도 동자승은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키다리 땡추를 따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쉬면서 밥이나 먹고 가세."

느지막한 오후쯤에 한적한 국밥집에 당도한 키다리 땡추일행은 짐을 푼 뒤 셈으로 베를 넉넉히 잘라 주고선 국밥을 허겁지겁 먹어대었다. 애향이는 별로 먹고 싶은 생각도 없는지라 한 쪽으로 물러서 웅크려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곧 해가 질 터인데 이 곳에서 아예 쉬어 가야겠구나. 아이 곁에서 절대 떠나지 말라."

키다리 땡추는 부하들에게 엄히 명을 내리고선 강석배에게 같이 술을 마실 것을 권했다.


"아닙니다. 어제도 걷고 오늘도 길을 서두르느라 여독이 많습니다. 이만 쉬겠사옵니다."

"그도 그렇군."

키다리 땡추는 혼자 술잔을 기울였고 강석배는 옆에서 금세 곯아 떨어졌다. 얼마 후 키다리 땡추는 술기운에 잠이 들었고, 늦은 밤이 되어 강석배가 주위를 확인한 후 서서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 애향이가 자고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뉘시오이까?"

"강별감일세."

방안에서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돌아가시옵소서."

"내 꼭 할 말이 있네 들어주겠나?"

"......"

"이유는 묻지 말고 지금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게."

애향이는 자려는 준비도 안 한 모양인지 금세 문을 열고 강석배를 보았다.

"밤길을 더듬어 서두르려는 것입니까?"

강석배는 누가 들을세라 숨소리마저 죽이며 말했다.

"여길 떠나 어서 도주하라는 것이네! 저들과 있다가는 자네 목숨이 위태로우이."

애향이는 강석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유를 묻지 말라니요?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게다가 제 어미는 어찌하오리까?"

"자네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보았네. 그렇기에 저들은 필시 너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야.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책임지고 돌보겠네."

"......제게 왜 이러는 지요? 이런 병 주고 약 주는 격의 호의는 갚을 길도 없거니와 부담스럽사옵니다."

강석배는 깊은 한숨을 내 뱉었다.

"아끼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모양을 보고 싶지 않아서일세. 뭐하나! 꾸물댈 틈이 없네!"

애향이는 강석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망설였다.

'이 사람이 백포교와 나의 사이를 알고 이를 질시해 거짓으로 이러는 것은 아닐까?'

망설이는 애향이를 보며 강석배는 애가 탄다는 듯 급히 말했다.

"서두르게! 한양으로 가지말고 남쪽으로 한동안 가 있게나! 그러다 적당할 때 한양으로 돌아오면 되네! 여기 여비를 줄 터이니 받게나!"

"적당한 때라니요......?"

얼떨결에 두둑이 엽전 꾸러미까지 받아든 애향이는 이제 강석배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네. 자, 어서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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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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