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해가 지는 불암산 산자락 아래에서 애향이는 대청에 앉아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혜천스님을 유혹했던, 당장이라도 그 불쾌한 기억을 잊고 산자락을 내려오고 싶었지만 약조한 돈을 받지 못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애향아! 애향이 있느냐!"
멀리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건만 애향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애향이를 찾아 부른 사람은 별감 강석배였다.
"내가 많이 늦었구나!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산을 내려가자꾸나!"
애향이는 강석배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어차피 가짜 중 일행도 동자승을 데리고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 들었사오이다. 그 때를 맞춰 온 것이 아니옵니까?"
강석배는 애향이의 옆에 앉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진 빚은 이미 다 갚았으니 이제 뜻대로 하게나."
"뜻대로 하라고요?"
애향이는 강석배를 노려보았다.
"어디 빚만 갚아 준다 했사옵니까? 박종사관의 첩으로 날 보낸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뭐라? 박종사관? 박교선 말인가?"
강석배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럼 누굴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심종사관이 아니었나?"
강석배는 여전히 놀란 듯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되물었지만 애향이는 이미 강석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선 숫제 말문을 닫아 버렸다. 강석배는 벌떡 일어나 키다리 땡추를 찾아갔다.
"아니 이런! 언제 온겐가!"
키다리 땡추는 반갑게 강석배를 맞이했지만 강석배는 굳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애향이를 어찌 할 작정이십니까!"
"어찌 하다니?"
"언제 박종사관의 첩으로 보낸다고 했사옵니까?"
키다리 땡추는 그 얘기였냐 하는 표정으로 강석배를 진정시킨 후 종에게 저녁상을 봐 오라 일렀다.
"자, 그게 어찌 된 일이냐 하면…. 알다시피 포도청의 두 종사관은 우리에게 매수 된 지 오래일세. 그런데 심지일과 박교선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네."
"그게 뭘 어쨌단 말입니까?"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게나 원래 박교선이 애향이에게 관심이 있었다네. 그런데 심지일이 일승이 형님에게 어떤 일을 하는 대가로 애향이를 첩으로 앉혀 줄 것을 원했고 일승형님은 이를 승낙했다네."
"그래서 애향이의 어머니를 속여 빚을 지게 만든 것이 아닙니까. 그건 저도 압니다만."
강석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럼 심지일이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알지 말아야 할 것을 많이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금강산 유람을 간 것도 알겠군?"
키다리 땡추의 말에 강석배는 고개만 끄덕였다.
"알고 보니 심지일이라는 자는 박교선이 미워 애향이를 자신의 첩으로 들여앉혀 달라고 한 것으로 보이네. 박교선이 어찌 이를 알았는지 시키는데로 다 할 터이니 애향이를 첩으로 삼게 해 달라고 일승형님에게 매달리지 뭔가. 졸지에 여자 하나로 두 종사관을 쉽게 부릴 수 있게 된 일승형님은 박교선에게도 약조를 했네."
"어찌 그럴 수가 있사옵니까! 박선달께서도 애향이를 향한 내 마음을 알 터인데!"
강석배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펄펄 뛰었고 뜻밖의 일에 키다리 땡추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위로를 한답시고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어차피 나이가 찬 기생이 아닌가. 내 다른 기생을 알아보고 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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