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령이 느슨해져 양반들의 출입이 다시 잦아졌을 때라 기방은 밤마다 바쁘기만 했다. 기방의 잔일을 도맡아서 하는 퇴기 오월이의 일손도 덩달아 분주해져만 갔다. 힘든 밤을 보내고 쉴 무렵이 되면 오월이에게 때때로 나타나곤 하는 불청객이 있었는데 바로 우포도청 포장 박춘호였다.
"오월아! 언제까지 날 피할 참이냐! 언제까지 이 구질구질한 기방에서 살 참이냐!"
오월이는 박춘호의 술주정에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피하는 게 아니라 인연을 끊은 것이고 구질구질한 것은 기방이 아니라 박포교 그대가 더 하지 않소. 날 이리 만든 것이 다 누구 탓이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 말은 필요 없다고 누차 얘기했소."
날마다 이런 짓을 되풀이하는 박춘호에게 오월이는 냉담하기만 했다. 보다못한 행수기생 윤옥이 박춘호를 받아줄 것을 넌지시 권하기라도 하면 오월이는 코웃음을 쳤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시오. 그 인간이 술과 도박에 빠져있을 때가 차라리 나을 지경이었소. 날 팔아먹고 모른 척 한 사람이 이제 홀아비 신세를 못 견뎌 술만 취하면 날 찾으니 이 무슨 심사란 말이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런 자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소."
그쯤 되면 윤옥도 오월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것 이 다였다. 오월이의 이런 단호함을 모르는 양, 어느 날 박춘호는 백위길을 데리고선 기방의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술을 진탕 마셔대었다. 그 날 따라 달리 술상을 봐올 사람이 없는지라 오월이는 박춘호가 술을 달라고 독촉할 때마다 가야만 했다.
"거 애향이는 잊게! 여자란 잊어야 할 때 잊어야지 미련을 두면 나같이 되네!"
오월이가 드나들때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박춘호는 백위길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오월이는 사실 자기더러 들으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박춘호가 일부러 말을 걸지 않는 한 구태여 관여할 이유는 없었다.
"후회하기 싫습니다."
그 말에 백위길은 이렇게 대답했고 이후로는 뭐가 뭔지도 모를 욕과 탄식이 섞여 오고갔다. 오월이는 어서 박춘호가 기방에서 나가주길 바랬지만 둘의 술자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술을 찾는 박춘호의 소리가 한참동안 끊겼고 술에 취해 자는 것이라 생각한 오월이는 그들을 깨우고 방을 치우기 위해 조용히 문지방을 두드렸다.
"오월이라면 잠깐 들어오게."
오월이는 뜻밖에 차분한 박춘호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술병이 엎어지고 안주가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중에 백위길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고 박춘호는 복색이 헝클어진 채 시선을 땅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오월이가 이곳의 기생일 때 나와 산 적이 있었다네. 참 오래 전의 일이었지… 그 때 내가 오월이의 속을 무던히도 썩혔어. 그런데 오월이가 날 멀리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은 아니었지."
백위길은 눈물을 훔치며 시뻘게진 눈으로 박춘호의 말을 경청했다.
"도박에 술에 찌들어 허우적대던 어느 날, 한 양반이 내게 접근해서는 이렇게 말했다네 '오월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양반이 있는데 그 집의 첩으로 앉히게. 그러면 자네의 도박빚은 물론 일 천냥을 주겠네. 석 달 후 오월이는 내가 책임지고 다시 돌려주겠네.' 나로서는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조차 없었다네."
"그만하시오."
오월이가 옛일을 다시 떠올리기 싫다는 듯 박춘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에도 박춘호는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오월이가 덜컥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일년이 지난 후에야 아이를 뺏긴 후 그 양반 집에서 내침을 당했네."
"그만 하라 하지 않았소!"
"오월이는 잔을 들어 박춘호에게 집어던졌다. 취중이라 박춘호는 이를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은 후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 애는 당신의 씨란 말을 다시 해주리까!"
백위길은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고 머리를 감싸 쥔 박춘호 앞에서 오월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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