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그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여인의 당돌함에 기가 질려 있던 혜천스님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보살께서 미천한 저에게 너무나 지대한 자비를 베푸시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전해드리려 함입니다."
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혜천스님의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스님,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전생에 좋은 연이 있기에 이리 만나는 것이 아니옵니까?"
혜천스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요망한 것! 내가 딴 마음이 있어 이러는 것 아니냐!"
혜천스님이 큰 소리를 친 이유는 여인의 기를 질리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누군가 들어 와주어 곤란한 상황을 모면해 보겠다는 심산도 있었다. 하지만 혜천스님의 바람과는 달리 문밖에서는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딴마음은 스님께서 이미 품고 계신 듯 합니다. 제가 스님께 위해를 가했습니까? 아니면 추파라도 던졌는지요? 어찌 이리 과한 언행을 보이십니까?"
여인은 혜천스님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 했다. 혜천은 몸을 부르르 떨어 밖으로 뛰쳐 나가려 했으나 여인은 혜천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슨 짓이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니 들어주십시오."
혜천스님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인은 뭔가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혜천스님의 얼굴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겠다고 했으면 어서 해야 할 것 아니오?"
"도력이 높은 스님이라 들었건만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다 허튼 소문일 뿐이오."
잠시 방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어디선가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혜천스님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허… 아침에 뻐꾸기는 웬일인고."
순간 혜천스님은 자신의 말에 뭔가 주위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채고선 크게 놀라 벌떡 일어섰고 그와 동시에 방문이 왈칵 부서지며 포교와 포졸이 들이닥쳤다.
"도와주십시오! 이 중이 절 희롱하려 했사옵니다!"
여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혜천스님을 밀치며 소리쳤고 포교 김언로는 포졸들을 시켜 다짜고짜 당황한 혜천스님을 꽁꽁 묶었다.
"네 이놈! 부녀자를 희롱하는 중놈이 불암산 자락에 있다 하기에 여기 숨어 지켜보고 있었느니라!"
오라줄에 묶여 밖으로 질질 끌려나간 혜천스님은 자신의 몸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동자승부터 찾았으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데리고 온 아이가 있사온데…."
"이번에는 무슨 수작을 부려 빠져나가려는 겐가. 달그림자?"
오래 잊고 있었던 자신의 별칭을 서슴없이 부르는 김언로의 말에 혜천스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광경을 보며 웃음을 지은 채 불암사 주지가 다가왔다.
"불경만 외더니 눈썰미가 없어졌군."
불암사 주지의 말에 혜천스님이 잘 살펴보니 금강사에서 마주친 바 있던 땡추 일행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들! 설마!"
실상인즉, 원래 불암사 주지는 다른 곳으로 쫓아 보낸 후 땡추 일행 중 이승(二僧)이라 불렸던 키다리 땡추가 주지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는 어찌 했느냐!"
키다리 땡추는 능청스런 표정으로 혜천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이라니? 난 모르는 일일세. 부녀자를 희롱해 파계를 한 주제에 허황된 수작으로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게! 김포교는 어서 이 자를 끌고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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