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75> 공장일기<43>

등록 2004.07.15 14:03수정 2004.07.1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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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8년 동안 다닌 공장을 마악 그만 둘 당시, 낙동강 둑에 앉아 있는 나

8년 동안 다닌 공장을 마악 그만 둘 당시, 낙동강 둑에 앉아 있는 나 ⓒ 이종찬

"니 그 소문 들었나?"
"그기 갑자기 뜬금없이 머슨 말이고?"
"우리 공장이 고마(그만) 00그룹으로 넘어갔다 카더라."
"뭐라꼬? 그기 참 말이가? 그라모 우리는 우째 되는 기고?"
"나도 확실하게는 잘 모르는데, 핵심 간부들은 거의 다 모가지 되는 모양이더라. 그라이 좀 있으모 우리도 파리 목숨 안 되것나."
"설마. 그동안 시키는 대로 쎄(혀) 빠지게 일만 열심히 한 우리가 머슨 죄가 있노. 다 글마(공장간부)들이 경영을 잘못한 탓이지."



그랬다. 한동안 뜬소문으로만 은밀하게 나돌던 00그룹과의 합병설은 마침내 현실로 나타났다. 그때부터 공장 안은 몹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눈꼴 사나울 정도로 자주 보이던 공장 간부들의 얼굴도 하나 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관리 파트에 있던 일부 간부들은 스스로 그만 두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당장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생산부 소속 동료들은 여전히 예전처럼 일일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기계에 매달려 죽어라 일을 해야만 했다. 나 또한 여전히 사출기에 매달려 시험생산을 하고 있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제품 개발을 맡은 프로젝트팀도 해체되지 않았다.

00그룹과 합병이 되면 새로운 이름표를 달아야 할 공장 이름도 예전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월급이 깎이거나 오르는 것도,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총무부를 비롯한 관리 파트의 간부들 일부만 바뀌었을 뿐, 생산부 간부들 또한 거의 바뀌지 않았다.

"우리 같은 공돌이 공순이들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카이. 그라고 앞으로 더이상 정리해고도 없다카더라. 00그룹과 합병을 할 때, 관리 파트 일부만 교체하고 다른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인수한다고 했다 카데(하더라)."
"누가 그라더노?"
"00그룹에 댕기는(다니는) 내 친구들 중에 끄나풀이 몇 명 안 있나."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라는 기다. 니는 '떡 하나 주모 안 잡아 먹지?' 카는 호랑이 이야기도 모르나?"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 달라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아니, 공장 안에 떠도는 소문이 더 무서웠는지도 몰랐다. 곧 부서끼리 통폐합을 하고, 현장 간부들은 물론 현장 노동자들까지도 절반 가까이 정리한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그룹 차원에서 예전보다 훨씬 높은 임금과 좋은 근로 조건으로 재계약한다고도 했다.


특히 내가 일하는 사출실은 새로운 사출기를 몇 대 더 사들여 지금보다 훨씬 더 넓은 곳으로 옮긴다는 그런 소문도 들렸다. 근데, 그렇게 되려면 프로젝트팀에서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제품개발에 반드시 성공을 해야만 했다. 만약 제품 개발에 실패한다면 사출실 자체는 아예 폐쇄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나는 갈팡질팡했다. 새로운 제품 개발은 시간을 끌고 있었다. 또한 성공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제품은 외주를 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였다. 왜냐하면 내가 만지는 사출기는 시험 생산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용량이 너무 작아 본격적인 생산은 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새로운 사출기 구입 비용과 새로운 제품의 생산량을 비교해 볼 때 수지를 맞추기가 어려울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앞으로 공장을 그만두고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휴일이 되면 홀로 여기 저기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곰곰히 생각을 해보아도 내가 가야 할 길은 꼭 하나뿐이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문학의 길로 걸어갈 것이라는 그 야무진 꿈 하나 때문에 8년 동안의 그 고된 공장 생활을 무사히 이어왔는지도 몰랐다.

근데 막상 공장을 나오면 어디에서 밥벌이를 할 것인가. 공장이 아닌 어디에 가서 내 문학의 길을 보다 탄탄히 닦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보아도 내가 마땅히 갈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또한 8년 동안의 내 젊은 청춘이 숨쉬고 있는 그 공장을 떠난다는 것이 몹시 서운하고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야무지게 다졌다. 지금 내가 공장을 떠나지 못한다면 자칫하면 나는 평생 이 공장을 떠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시, 내가 하고 싶은 문학 활동도 마음껏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나는 문학 때문에 공장 간부들에게 얼마나 많이 시달려왔던가.

이제, 이제는 벗어나야만 한다. 비좁고 답답한 우물 속 같은 이 공장을 벗어나 드없이 넓은 세상을 향해 새처럼 훨훨 날아가야만 한다. 그 어떤 어려움이 내 앞을 가로 막는다 하더라도 나는 내게 주어진 문학에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서러운 현장 노동자들의 고된 삶을 시라는 씨줄과 날줄로 꼼꼼이 엮어내 만사람에게 알려야 할 책무도 있다.

"아무래도 제가 공장을 그만 두어야 할 것 같습니더."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한창 새로운 제품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자네가 그만 두면 사출기는 누가 돌릴 거야.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인자 공장을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해보고 싶습니더."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참아. 개발이 끝나면 곧바로 사출실도 더 큰 곳으로 옮길 거야. 그러면 그 부서장을 누가 맡겠어? 우리 공장에서 자네 말고는 사출기를 만질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저도 그동안 많이 생각했습니더."
"안 돼!"


1986년 3월, 나는 프로젝트팀 간부들과 주변 동료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꼬박 8년을 다닌 공장을 그만 두고 말았다. 그것도 사표를 받아주지 않아 총무부에 사표를 슬쩍 던져놓고 곧장 여행을 떠나버렸다. 며칠 동안의 여행길에서 나는 내내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읊조리며, 나 스스로를 더욱 단단하게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김민기 작사 작곡, 양희은 노래 '아침이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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