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밭에는 구리가 살고 있다 카더라"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76> 멍석딸기

등록 2004.07.19 15:04수정 2004.07.1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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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들이 '줄딸기'라고 불렀던 멍석딸기

우리들이 '줄딸기'라고 불렀던 멍석딸기 ⓒ 이종찬

못가예
이대로 쫄쫄 굶다가
이 집 저 집 싸리대문 넘보는 각설이로 떠돌지라도
지주집 식모살이는 절대 못가예


대꽃 피어나는 보릿고개
깜부기 까맣게 흔들리는 논두렁에 주저앉아
피멍 든 입술 질끈 깨물며
소쩍새처럼 징징 울던 누야

싫어예
이대로 시집 못 가
이 산 저 산 떠도는 몽달귀신과 살지라도
면장집 후처살이는 죽어도 싫어예

잔별 총총한 칠석날
오작교에 눈썹 걸어놓고
검붉게 말라붙은 젖꼭지 볼끈 동여매며
부엉이처럼 징징 울던 누야

-이소리 '멍석딸기' 모두


경남 창원군 상남면 사파정리 동산부락 1089번지. 이 주소가 바로 내가 태어나 자란, 내 유년의 배 고프고도 아름다운 기억들이 깡그리 묻혀 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 내 고향은 여기저기 이름표만 허물처럼 덜렁 남겨놓은 채 아득한 기억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탐스런 멍석딸기가 빨갛게 익어가던 그 들판과 야산들도 모두 포크레인의 삽날 아래 사라졌다. 소풀을 베다가 까맣게 익은 오디를 따먹으며 앉아 놀던 마당뫼도, 가시나들이 금모래 두어 줌 올려놓고 풀을 짓찧으며 밥짓기놀이를 하던 그 고인돌도, 모가 시퍼렇게 자라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흐르던 그 맑은 도랑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a 멍석딸기를 바라보면 그때 시집 간 그 누님이 생각난다.

멍석딸기를 바라보면 그때 시집 간 그 누님이 생각난다. ⓒ 이종찬

지금 그 자리에는 반듯한 이층 양옥과 각종 상가들과 백화점, 그리고 바라보기만 해도 어지럽기만 한 25층짜리 고층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멍석딸기가 특히 많았던 그 마당뫼는 지금 허리가 반쯤 잘려나간 채 이층 양옥들에 둘러싸여 그곳 사람들의 체육공원 비슷하게 변해 버렸다.

그 어디에도 내 어릴 적 고향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의 나를 키워낸 내 고향과 내 고향에서 살았던 그 살가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때 그 아름다운 기억들은 내가 오래 꾼 한바탕 꿈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를 그리고 있단 말인가.


"히야! 이기 뭐꼬? 줄딸기 아이가."
"야야, 조심해라. 우리 옴마가 그라던데, 딸기밭에는 반드시 구리(뱀)가 살고 있다 카더라."
"이 지게 작대기로 후차뿌모(내쫓으면) 되지."
"조심해라. 구리 훗다가(내쫓다가) 맛있는 딸기까지 다 조질라(망칠라)."


그랬다. 그때 나와 동무들은 멍석딸기를 '줄딸기'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멍석딸기는 주로 냇가 둑이나 논두렁 주변에 호박넝쿨처럼 줄기를 길게 뻗어, 그 줄기 끝부분에 빠알간 딸기를 서너 개씩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멍석딸기는 보기에는 아주 탐스러웠지만 산딸기에 비해 단단한 씨앗이 많아 먹기에 불편했다.

게다가 멍석딸기는 대부분 벌레 먹은 것이 많았다. 멍석딸기는 언뜻 보기에 아주 탐스럽게 잘 익은 것 같지만 막상 딸기를 따서 보면 어김없이 어느 한 쪽에 거무스럼한 점이 찍혀 있었다. 그 거무스럼한 점을 떼내고 나면 사실 먹을 게 별로 없었다. 종종 멍석딸기를 따다가 개미에게 물리는 적도 있었다.

a 멍석딸기는 맛은 있지만 딱딱한 씨가 많아 먹기에 조금 불편하다.

멍석딸기는 맛은 있지만 딱딱한 씨가 많아 먹기에 조금 불편하다. ⓒ 이종찬

내가 자란 고향 주변에는 멍석딸기가 아주 많았다. 밭두렁이나 논두렁뿐만 아니라 야트막한 산자락 수풀 곳곳에도 눈에 띄는 게 멍석딸기였다. 멍석딸기는 봄이면 잔가시가 촘촘히 박힌 줄기를 이리저리 마구 뻗기 시작하다가 줄기 끝에 진보랏빛 예쁜 꽃을 서너 송이 피웠다. 따스한 봄날에 산 너머 총각에게 시집을 가던 누님의 입술에 칠해진 그 예쁜 립스틱처럼 그렇게.

"올 봄에 시집 간 누야(누님) 안 있더나?"
"그 누야가 와?"
"그 누야 아랫배가 제법 불룩한 걸 보이(보니까) 벌시로(벌써) 아(아기)로 밴 모양이더라."
"니가 그거로 우째 아노? 누야가 시집을 가서 잘 묵고 잘 살다보이 똥배가 튀어나왔을 수도 안 있것나."


그렇게 봄이 가고, 모심기를 할 무렵이면 파아란 멍석딸기가 까만 잔털을 매달고 하나 둘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쯤이면 봄에 앞산 너머 시집을 갔던 누님이 친정에 다니러 오곤 했다. 그때 아랫배가 제법 불렀던 그 누님의 얼굴은 멍석딸기의 잎사귀 뒷부분처럼 조금 희스무레했다.

당시 첫 임신을 한 뒤부터 열 달이 지나야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우리들은 누님과 멍석딸기를 걸고 내기를 했다. 누님이 아이를 먼저 낳을까? 아니면 줄딸기가 먼저 익을까? 하는 그런 내기. 그때 나는 줄딸기가 빨갛게 익을 때면 누님이 아이를 낳을 거라고 우겼다.

근데, 멍석딸기는 그 누님이 아이를 낳기도 전에 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오디와 산딸기가 마악 사라지고, 우리들 입이 몹시 심심해질 무렵, 멍석딸기가 빨간 빛을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빛깔만 빨갛게 변했을 뿐 그때까지도 우리들이 따서 먹을 수 있을만치 다 익은 것은 아니었다.

a 지금 들에 나가면 멍석딸기가 한창 익어가고 있다.

지금 들에 나가면 멍석딸기가 한창 익어가고 있다. ⓒ 이종찬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마음이 몹시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 누님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은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 마을 곳곳에 지천으로 깔린 그 멍석딸기는 하루가 다르게 빨간 빛을 띠며 탐스러운 열매를 뾰쭘히 밀어올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옴마! 올봄에 시집 간 누야 있제?"
"와?"
"그 누야 아(아기) 운제(언제) 낳노?"
"야가(얘가) 야가. 콩알만 한 기 못하는 소리가 없네. 아, 아(아기)야 열 달이 지나야 낳지. 씰데 없는 소리 고마 하고 퍼뜩 가서 소풀이나 한짐 비온나(베 오너라)."
"뭐라꼬? 그라모 그 누야가 올 겨울이 되어야 아(아기)로 낳는다 그 말이가."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멍석딸기가 빨갛게 익을 텐데 어쩌지? 정말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그 내기는 진 아이가 멍석딸기를 따서 이긴 아이에게 몽땅 갖다 바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뱀이 많아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 그 수풀에 있는 멍석딸기를 말이다.

"이크!"
"와… 와 그라노?"
"도… 독새(독사)다. 지게 작대기 좀 주라."
"아나."


마침내 멍석딸기가 빨갛게 익은 그날, 나는 잔꾀를 부렸다. 그 수풀 속에는 정말 탐스럽게 잘 익은 멍석딸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뱀 허물까지 걸려 있는 그 수풀 속에 정말 들어가기가 싫었다. 게다가 내가 가시에 찔려가며 맛난 그 멍석딸기를 따내어도 몽땅 동무들 차지였다.

a 딸기밭 근처에는 뱀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딸기밭 근처에는 뱀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 이종찬

나는 독사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지게 작대기로 잘 익은 멍석딸기가 매달린 딸기 줄기들을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빨갛게 매달린 멍석딸기들도 모두 풀숲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내가 보기에도 탐스럽게 잘 익은 그 멍석딸기가 정말 아까웠지만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멍석딸기가 떨어진 풀숲 사이에서 진짜 독사가 한 마리 기어 나오는 게 아닌가. 삼각형의 뾰쪽한 머리를 하고 있었던 그 독사는 마구 풀숲을 후려치던 내 지게 작대기에 몇 대 맞았는지 몸통 일부를 허옇게 뒤집으며 이리저리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동무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돌멩이로 독사를 마구 짓찧었다.

"뱃떼기(뱃가죽)로 드러내고 꼼짝 않는 걸 보이 인자 죽었는갑다."
"구리(뱀)가 뱃떼기로 드러내고 죽으모 여시비(여우비)가 온다 카던데."
"혹쟁이 영감한테 갖다 주자. 눈깔사탕 몇 개 값은 안 주것나."
"죽은 거는 안 받는다 카더라."
"그라모 파 묻어뿌자."


그래. 지금도 탐스럽게 익어가는 멍석딸기를 바라보면 앞산 너머 시집을 간 그 누님의 진보랏빛 입술이 떠오른다. 그해 겨울, 그 누님은 딸 쌍둥이를 낳았다고 했지, 아마. 그리고 그 이듬 해 멍석딸기가 다시 탐스럽게 익어갈 무렵 그 누님의 아랫배는 또다시 앞산처럼 볼록하게 불러오기 시작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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