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원목열(목책열). 총연장 331m. 세 차례에 걸친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청해진이 있었던 828~851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짐. 높이 3~4m 직경 30cm 내외의 50~60년생 소나무를 해변에 박아 놓은 것으로 접안시설 내지 방벽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오창석
경제, 군사적으로 강대해진 그는 중앙 정치에도 관여하게 되는데 838년 왕위 쟁탈전에 패해 도망 온 김우징을 도와 이듬해 그를 신무왕에 즉위시킨다. 그러나 신무왕이 6개월 만에 죽고 태자인 문성왕이 즉위하여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경주의 귀족들은 그의 세력 확장에 두려움을 느껴 반대한다. 이런 대립 과정에서 중앙 정부는 한때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 그를 암살하고 만다. 이후 청해진은 5년간 더 지속되었으나 851년(문성왕 13년) 염장이 이끈 정부군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고 그의 군대와 주민들은 모두 벽골군(지금의 전북 김제)으로 강제 이주되는 운명을 맞는다.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이 자신의 문집(文集)에서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신라명신으로 추앙받아 왔지만, 정작 우리의 기록에서는 그를 찾아 보기 힘들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해상왕이었던 그의 마지막 길이 신라 정부에 대항한 반역자로 끝맺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00여년이 지난 지금, 장보고와 청해진은 역사 속에서 걸어 나와 재평가 되고 있다. 전남 완도를 가면 그 옛날 융성했던 해상왕국의 자취들을 만날 수 있는데, 청해진의 본영(本營)으로 추정되는 장도(將島, 일명 장군섬)는 썰물 때면 걸어 들어 갈 수 있다.
장도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면, 과연 동아시아의 바다를 호령했던 해상왕국의 지리, 군사적 요충이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장보고를 모신 당집과 섬 둘레에 흙을 한켜한켜 쌓아 올려 조성한 판축토성, 지금도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는 길이 331m의 목책열을 보면 1200년 전의 장도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