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절· 건강 상징했던 '생필품 1호'

[이철영의 전라도기행 30] 담양의 참빗

등록 2004.06.14 16:21수정 2004.06.19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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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 생명력을 보여주는 담양의 대나무
힘찬 생명력을 보여주는 담양의 대나무오창석
머릿속을 근질근질하게 하는 '이'와 함께 살던 시절, 참빗은 그 귀찮은 동숙자들을 몰아내는 데 쓰이는 유일무이한 도구였다. 머릿속에 기거하는 '이'를 잡는 데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던 할머니는 손자의 고통이라고는 도통 안중에 없었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대도 할머니는 억센 손으로 그것을 들고 머릿속을 박박 긁어대며 입가에 승리의 미소를 흘렸다. 달력의 하얀 뒷면에는 검은 머릿니와 서캐가 쏟아지고, 그 녀석들은 할머니의 손톱 밑에서 '찍찍'파열음을 남기며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마감해야 했다.

또 어떤 녀석들은 위 아랫니 사이에 끼어 '톡톡' 소리를 내며 이승을 하직하곤 했는데 할머니의 야릇한 얼굴 표정은 '혹시 내 피맛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가장 일반적인 모양의 참빗
가장 일반적인 모양의 참빗오창석
그런데 손자의 고혈을 빨아대던 '이'를 격퇴하며 적개심에 불탔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침이면 온데 간데 없었다. 그녀는 30대의 청상으로, 세상의 온갖 풍파를 거쳐 오면서도 고고하고도 단아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경대 앞에서 얼레빗으로 긴 머리를 얼추 빗어내린 다음, 참빗으로 천천히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동백기름을 발랐다. 그녀가 머리를 다듬는 일은 구도자의 행위처럼 보였다.

좀 더 멋을 부린 참빗
좀 더 멋을 부린 참빗오창석
평생 머리를 빗으며 그녀는 지아비 없는 설움과 정절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그리고 폐경이 되어버린 이후에도 확인되는 여성성 앞에서 절망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혹독한 자기검열의 과정과 시간의 퇴적 속에 화석화되어 버렸을 터, 그저 할머니의 모습은 정성들여 머리를 빗는 정갈함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빗은 옛 사람들에게 정절과 사랑, 건강의 상징이었다. 사랑의 징표로 준 빗을 잃어버리면 여인이 정조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또 빗을 주면 혼인을 허락하는 것과 같았다. 이가 날 무렵 아이에게 얼레빗질을 해주면 얼레빗처럼 이가 드문드문 돋아난다고 믿었고 제삿날에 머리를 빗으면 조상신이 노하여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상중에는 망자에 대한 예로 머리를 감지도 빗지도 않았다. 또 하루에 세 번 이상 머리를 빗으면 바람날 징조라 하여 금기시했으나 건강을 위해서는 하루에 50~100회 빗질하기가 권장되기도 했다.

생활필수품으로써 오랜 역사를 가진 빗은 먼 옛날 '낙랑'이나 삼국시대의 유적에서도 발견되는데 재료 또한 다양하여 나무, 은, 자라등껍질 등이 쓰였다. 옛부터 죽세공품의 산지로 유명한 전남 담양에서는 300여년 전부터 참빗이 생산됐는데 일제하에서는 300여 호가 넘는 집이 이 일에 종사했다. 6대째 같은 자리에서 참빗만을 만들어 오고 있는 고행주(담양읍 향교리, 70세)씨는 이 땅의 몇 안 되는 '참빗장'이다.

6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참빗장 고행주(무형문화재 제15호)장인   ⓒ2004 오창석
6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참빗장 고행주(무형문화재 제15호)장인 ⓒ2004 오창석오창석
"어려서부터 할아부지, 아부지 심부름함서 배우기 시작해서 한 60년 되얏소. 요새 사람들이 건강이다, 웰빙이다 해싼디, 요 참빗이 웰빙이요. 푸라스틱 빗이야 정전기 나고 피부에도 해로운디 참빗으로는 자주 빗어줄수록 좋제. 인자는 요새 사람들 보기도, 갖고 다니기도 좋게 맨들어."


참빗 하나가 완성되려면 15일에서 20일 정도가 소요되는데 500여 개 정도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참빗 하나가 모양을 갖추려면 백번도 더 손이 간다고 하는데, 과정을 실제 지켜보니 백번이 아니라 수백 번도 더 손길이 가는 고된 작업이다.

제작 과정에서 가장 세심한 정성이 요구되는 것은 빗살의 간격을 맞추는 일이다. 빗살의 간격은 살을 묶는 무명실에 의해 결정된다. 가장 조밀한 밀소(密梳)의 경우 두 가닥으로 꼰 무명실로 묶어 납작한 형체의 머릿니는 물론 서캐까지 훑어낼 정도로 촘촘하다.



가장 세심한 정성이 요구되는 빗살의 간격을 맞추는 과정
가장 세심한 정성이 요구되는 빗살의 간격을 맞추는 과정오창석
"60년도 넘게 하셨는데 안 질리세요?"
"어려서야 일 시키면 실실 도망 댕겼제. 그러다 뚜드러 맞고. 그래도 요것으로 이때껏 묵고 살았어. 누가 놀자고 해도 인자 노는 것도 잊어 부러서 못 놀아. 일 허는 것이 편해."

대나무를 다듬는데 쓰이는 연장들
대나무를 다듬는데 쓰이는 연장들오창석
생활수준의 향상과 '파마머리'가 유행하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담양은 참빗과 죽세공품의 중심지다. 예전에는 혼수용 죽제품 등을 장만하려면 서남해의 먼 섬에서도 이곳을 찾았고, 지금도 담양읍 관방천 고수부지에서 열리는 죽물장(2,7일장)은 전국에서 유일하다.

30년 전만 해도 생금(生金)밭(대밭) 하나 가지면 자식들 가르치고 남부러울 것 없다던 융성함은 없으나 담양군에서는 5월초면 '담양대나무축제'를 열어 죽향(竹鄕)의 전통을 잇고 있다.

담양 읍내로 가면 대나무와 그로 만든 죽제품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대나무박물관'과 남도 땅 대숲의 정취를 느껴 볼 수 있는 '죽록원(竹綠園)'에 들려볼 만하다. 거기에다가 죽순회무침에 동동주 한 잔 곁들여 황진이의 시 한수 읊조리고, 죽순된장국에 밥 한 그릇 비우면 담양 땅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

누가 곤륜옥(崑崙玉)을 잘라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던고
직녀는 견우님이 떠나신 후에
시름하며 허공에 던져 두었네
<황진이, 영반월(詠半月)>


담양 읍내에 있는 대나무박물관
담양 읍내에 있는 대나무박물관오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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