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6) 호박꽃 예찬

등록 2004.07.18 13:24수정 2004.07.18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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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장마가 그치자 함초롬히 핀 호박꽃, 장마로 굶주린 벌들이 꽃가루를 먹느라고 여념이 없다

장마가 그치자 함초롬히 핀 호박꽃, 장마로 굶주린 벌들이 꽃가루를 먹느라고 여념이 없다 ⓒ 박도

지루한 장마였다. 사람이란 간사해서 가뭄이 계속될 때는 빗방울이 떨어지면 "빗님이 오신다"고 환호하지만, 그런 반가운 비가 사흘만 내리면 "이놈의 비 언제 그칠 거냐?"고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한다.


아직 먹구름이 다 걷힌 것은 아니지만 빗줄기가 멎었고, 일기예보도 오늘로써 장마가 사실상 끝났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지대가 높아서 다행히 비 피해는 없었지만 오랜 장마로 집 안팎이 눅진눅진하고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a 암꽃, 수정이 끝나면 이내 꽃잎을 닫고 시들어버린다

암꽃, 수정이 끝나면 이내 꽃잎을 닫고 시들어버린다 ⓒ 박도

마당에서 물이 솟아 흐르는 바람에 집 안팎이 온통 질퍽질퍽하다. 텃밭에 나가자 그 새 잡초가 제 세상이었던 양, 춤을 추고 있다. 마당과 텃밭의 잡초를 모두 매자면 한 사나흘은 더 걸릴 것 같다. 저걸 모두 매줘야 할지, 적당히 타협하면서 잡초와 더불어 살아야 할지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그런데 잡초 속에 호박꽃이 활짝 웃고 있다. 가까이 가자 벌들이 용케도 알고 날아와서 꽃가루를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열매를 맺기 위한 자연의 심오한 조화를 지켜보면서 새삼 호박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암꽃이 하나면 수꽃은 열 이상이다. 수꽃은 호박잎 사이로 뾰족이 올라와서 저마다 꽃잎을 벌린 채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은다.

그런데 암꽃은 호박잎 밑에 숨어서 잠깐 피워 수정을 마치면 얼른 꽃잎을 닫고 이내 시들어버린다. 제 임무만 끝내면 말없이 시들어져버린다. 그래야 제 품위도 지키고 집안이 시끄럽지 않을 테지.


흔히 사람들은 못 생긴 여자를 호박꽃에 견준다. ‘순호박’이니 ‘박호순’이니 하고 놀린다. 대부분 여성들은 자신의 외모에 엄청 신경을 쓴다. 심지어 자신의 외모를 비관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어리석은 소녀도 있다.

취업을 앞둔 여성들이 시험공부보다 먼저 성형외과를 찾는 세태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겉으로 드러난 미모를 중시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후천적으로 가꿔지기도 한다. 또 아름다움이란 내면의 아름다움도 있고,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적인 아름다움도 있다. 아름다움의 상지상은 안팎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겠지만,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드물다”는 옛 말처럼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렇다면 겉이 아름다운 것보다 속이 아름다운 것이 더 나을 텐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겉이 아름다운 것을 더 선호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형편없을 때 겉의 아름다움은 이내 표독함으로 변한다.

이와 반면 속이 아름다우나 겉이 그만 못하다가 스스로 인격을 가다듬고 마음을 바로 쓰면, 겉은 날로 날로 새로워지며 몰라보게 아름다워진다. 그러다가 50, 60을 넘어버리면 이제는 선천의 아름다움은 다 사라지고 후천의 아름다움만 남게 된다.

a 며칠이 지나면 주먹보다 더 큰 탐스런 열매로 자란다.

며칠이 지나면 주먹보다 더 큰 탐스런 열매로 자란다. ⓒ 박도

아름다움도, 인생도 그 후반이 더 중요하다.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잘 났다고 으스대는 사람도, 후천적인 아름다움(인품)을 닦는데 게을리 말아야 한다.

어느 순간 내 얼굴이 천하제일의 미인이 될 수도, 천하제일의 추남 추녀도 될 수 있다.

오늘 아침 잡초 속에 함초롬히 피어서 말없이 제 열매를 위하여 이바지하고 자신은 시들어버리는 호박꽃의 어진 마음씨를 보면서 이제까지 미처 몰랐던 호박꽃의 아름다운 덕성을 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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