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농사꾼의 귀거래사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5)

등록 2004.07.11 16:05수정 2004.08.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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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집 뒤뜰에 함초롬히 핀 원추리

집 뒤뜰에 함초롬히 핀 원추리 ⓒ 박도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
……………………

-이형기 <낙화>



a 지금 내가 거처하고 있는 집

지금 내가 거처하고 있는 집 ⓒ 박도

고교 동창이 손 전화를 걸어왔다. 서울 집으로 여러 번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안 돼 수소문해서 간신히 알았다면서 내가 서울을 떠나 강원도 산골에 살고있다는 데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왜 명예퇴직을 하고 낯설고 물선 강원도 산골로 들어갔느냐고 몹시 꾸짖었다. 학교에서 사직 압력 때문이냐, 건강 상 문제냐고 물었다. 그도 저도 아니고 내 자의로 그만 뒀다고 했더니 그는 도무지 내 처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내 언저리 사람들 가운데 열이면 여덟 아홉은 만류했다. 네 나이에 직장에 다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아무소리 말고 정년까지 채우라고 했다. 사실 나도 퇴직 문제를 많이 고민했다. 젊은 날 한때 방황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건강에 큰 문제가 없는 한 정년퇴직을 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 언제부터인가 적당한 때 물러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만 둘 때를 기다렸다. 아이 둘이 모두 학업을 마칠 때, 둘을 모두 결혼시킨 후…. 그런데 자식의 문제에 관한 한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혼사문제가 오갈 때 '부모가 현직에 있는 게 좋다'니 '그래야 하객도 많다'니 그런 세속적인 얘기도 없지 않았다. 그런 저런 얘기에 귀 기울이다가는 정년 전에 그만 두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a 내 글방, 외양간 터를 고쳐쓴 탓인지 퀴퀴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널찍해서 좋다.

내 글방, 외양간 터를 고쳐쓴 탓인지 퀴퀴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널찍해서 좋다. ⓒ 박도

나야 죽 평교사로 지냈지만, 언제인가는 한 선배가 어떤 지위에 20년이나 죽치고 앉아 있는 바람에 후배가 그 밑에서 옴쭉달싹도 못하고 몇 년을 기다리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서로 치고 받는 것도 지켜봤다.

여객선이 암초에 부딪쳐 조난을 당해 구조선으로 옮아 탔으나 정원 초과로 배가 가라앉을 때는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을 위해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 게 바른 순서요,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버려야 얻는 게 있다

외환 위기 이후 젊은이들의 실업 문제가 여간 심각치 않다. 대학원을 나오고도 석·박사 학위를 가지고도 취업을 못해 아우성이요, 한창 일할 수 있는 유능한 청년실업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런데도 미적거리고 있는 내 꼴을 보다 못해 아내가 먼저 용단을 내렸다. 산골에다 폐가 직전의 집을 얻어 손수 고치면서 둥지를 틀었다.

올 봄 나는 마침내 정년을 5년 남긴 채, 퇴임하는 결단을 내리고 이 산마을로 내려왔다. 퇴임 송별연 때 앳된 한 여선생님이 나에게 와서 선생님 덕분에 후임으로 교단에 서게 되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인사를 받고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곳에 내려와 사니까 곡해하는 분도 더러 있다. 집은 얼마에 샀느냐, 땅은 얼마나 샀느냐, 당신 사는 동네에 싼 땅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는 둥, 그들은 우리 부부가 페인트 냄새가 더덕더덕 나는 산뜻한 전원주택이나 요즘 한창 유행하는 펜션에서 땅값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사는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내외는 이제까지 그런 것과는 멀게 살아왔고, 이 고장에서 내 땅 한 뼘 없이 살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거저 얻다시피 얻은 집으로(일년 사용료 가을 추수 후 쌀 두 가마니 값), 10년 동안 구두 계약으로 살고 있다.

a 앞서 살았던 이영식 김현일씨 부부, 깊은 산속 옹달샘물처럼 맑은 분이다.

앞서 살았던 이영식 김현일씨 부부, 깊은 산속 옹달샘물처럼 맑은 분이다. ⓒ 박도

원래 이 집은 민속학을 전공하며 강릉대학교에 출강하시는 이영식씨와 그림을 그리는 김현일씨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소꿉장난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가면서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우리 내외에게 빌려준 집이다.

어느 스님은 ‘버려야 얻는 게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동안 도시에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문명 중독증 환자가 되었다. 이제는 가능한 문명을 버리고, 잃어버린 자연을 되찾고자 한다.

산골마을에 내려온 후 나는 도시적인 생각과 생활 방식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야 내가 이 마을에 오래 살 수 있고, 이곳 사람들이 당신네 이웃으로 대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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