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07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7.28 10:14수정 2004.07.2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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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 집무실엔 에인의 식솔들만 남았다. 강 장수가 기다려오던 순간이었다. 그는 권좌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에인 앞으로 당겨 놓으며 공손히 말했다.


"이제 이 권좌에 앉으실 차례입니다."

에인이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그 권좌에 앉았다. 그러자 강 장수가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자, 이제 계수(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함. 왕이 새로 등극할 때 신하들이 치르는 예)식을 올립시다."

모든 군사들이 에인 앞에 도열해서 깊은 절을 올리며 축원을 드렸다.

"장군님, 이 영광을 길이길이 보전하소서."

맨 앞에서 절을 올리던 강 장수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비쳤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 순간을 좀더 오래 끌고 싶어 고개를 들지 않는데 에인이 그만 모두들 일어나라고 재촉한 후 집무 명령부터 내렸다.


"이 밤이 가기 전에 성안의 질서부터 잡읍시다. 먼저 감금한 근위병은 뗏목에 태워 강 저쪽에 버리시오. 군주의 마차를 따라갈 수도 없도록 되도록이면 먼 강에서 쫒아버리시오. 다음은 군주의 시종들과 정원사, 약제실 등 전문인들은 가능한 한 그대로 부리도록 하시오. 우리는 아무도 이 성안의 살림을 모르오. 당분간을 그들을 부리면서 배우도록 해야 할 것이오. 대신 주방은 철저한 감시 하에 부려야 할 것이오."

그때 책임선인이 나섰다.


"주방은 제가 벌써 조치를 취했습니다. 당장 급한 것이 식사고 해서 임금계약제를 내세웠더니 모두 동참하더군요. 사실 그들에게 우리는 적입니다. 그냥 식사 일을 맡긴다면 그 안전성을 보장받을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 전에 없이 임금을 준다니까 아주 좋아들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반감이나 음모 따위도 없을 것입니다."

제후가 거들었다. 두 사람이 함께 그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에인이 잘 하셨소, 라고 말한 후 '책임선인, 그들에게 새 주인에 대한 충성까지 맹세시키시오, 그리고 말하시오. 이 시파르에서는 그들이 맨 먼저 천신의 어진 백성으로 등록된 것이라고 말이오'라고 덧붙였다.

에인은 책임선인의 철저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상당히 섬세하고 또 꼼꼼한 사람이었다. 그가 요석으로 표창을 던지기 시작했던 것도 나무 위로 기어가는 큰 지네를 화살보다 더 빨리 맞추어 잡기 위해서였듯이, 하나의 상황이 주어지면 그것을 세부로 정확히 파악해 하나하나 일사분란하게 처리해나가는 성미였다. 에인은 그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라가 세워지면 그대가 재상 일을 해야 할 것이오'라고 생각하며 다음 명령을 내렸다.

"자, 그럼 이제 의원들도 데려오시오."

책임선인이 그 명령을 받고 약제실로 향했다.

한 시간 후였다. 에인은 성안의 의원을 데리고 장수들과 함께 연병장으로 향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막 저자거리를 지나갈 때 은 장수가 에인 곁으로 다가오더니 나직이 아뢰었다.

"두두가 다쳤습니다만…."
"그 아이가 다쳐요? 그래서요?"
"하지만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불현듯 지난번 니푸르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아침에 두두가 사라진 후 재판을 받고 유배를 당하는 등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다면 이번엔… 그는 '빨리 가봅시다!'라고 소리친 후 급히 연병장으로 내달렸다.

부상자들은 무기고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 건물만이 온전했던 때문이었다. 에인은 은 장수에게 천둥이를 잘 지키라고 당부한 후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웬일인가, 사라졌다던 두두가 거기에 있었다. 팔에 붕대를 감고 벽에 기대 있던 두두는 에인을 발견하고 해죽이 웃으며 먼저 저쪽의 부상자들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두두의 외할머니와 닌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에인이 두두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제가 다쳤잖아요. 죽기가 싫었단 말이지요. 한데 퍼뜩 우리 외할머니는 날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나는 것이지요. 거 왜 아시잖아요? 우리 외할머니도 의원이시라는 것? 그래서 냅다 달려가서 모셔왔지요. 다른 부상자들도 살리려구요."
"그럼 네 상처는 어떻다시더냐?"
"나무껍질을 잔뜩 발라주시면서 엄살 부리지 않으면 곧 낫는데요."

그리고 두두는 다시 해죽 웃었다. 에인이는 웃지도 않고 물었다.

"너 장수들에게 장래 포부가 군장이라고 말했다면서?"
"그야 하늘의 해처럼 확실한 것이지요."
"하늘의 해처럼 확실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침이면 해는 반드시 떠오른다는 뜻이지요."
"그럼, 그런 사람이 첫박에 화살부터 먹었냐? 그러니 아무래도 그 포부 되물려야겠다."

두두는 고개까지 훼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지요. 남자의 포부는 계피꿀물이 아니니까요."
"건 또 무슨 소리냐?"
"계피꿀물을 마시면 흐늘흐늘해진다는 말이지요."

에인은 사건이 있던 전날 계피 꿀물을 마셨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미간을 좁히는데 두두가 얼른 알아차리고 둘러댔다.

"지금도 엄살떨지 말라고 할머니가 계피꿀물을 잔뜩 먹여서 조금 흐물흐물해졌지만요."

계피꿀물은 진정제나 푹 자라고 할 때 먹이는 것인가 보았다. 에인은 의혹 한자락을 털어내고 옆에 선 강 장수에게 지시했다.

"부상자는 모두 성으로 옮기시오. 치료도 거기서 받도록 조치하시오."

그리고 등을 돌렸다. 두두가 급하게 말했다.

"외할머니와 닌이에겐 인사도 아니 하고 가실 거예요?"

에인은 못들은 척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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