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계곡물보다 게임이 더 좋아요!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 분투기(16)

등록 2004.07.30 02:49수정 2004.07.30 15:5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선배.휴가 가서 좋겠다. 장소는 어디에요."
"무주구천동."
"온 가족이 모두 가는 거죠? 시원한 계곡물에. 생각만 해도 재미있겠네요."


며칠 전 여름 휴가를 떠나는 직장동료에게 가족과 함께 가는 바캉스를 부러워하며 말을 건넸다. 그러나 선배의 대답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아니, 그냥 부부끼리 가?"
"애들은 어쩌구요."
"컴퓨터게임에 미쳐서 잘 안따라 다니려고 해."

'이런 이런, 이제는 컴퓨터게임이 이 무더운 여름 시원한 계곡물에서의 피서까지 반납할 정도로 위력이 막강해졌구나.'

한탄하다보니 옆의 또다른 동료가 참견을 한다.

"요즘 초등학교 5~6학년만 해도 부모 안따라 다니려구 하는 거 몰랐어?"

아빠,엄마 따라 피서가지 않을래요

요즘 아이들이 영악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더운 여름철에 부모를 따라 피서를 가지 않고, 점심을 라면으로 때우며 게임에 열중하는 걸 재미있어 하는게 대세라니 갑자기 아이를 키우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매우 헷갈릴 수밖에.


도대체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요즘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피서를 시시해할 정도로 독립심이 강하다보니 피서 대신 혼자서 게임이나 하겠다는 의사표시인지, 아니면 더운 여름 시원한 계곡물에서의 피서를 사양할 정도로 게임에 빠져있다는 건지, 도대체 아리송하다.


만약 부모와 피서 안가겠다는 이유가 첫 번째 이유라면 그래도 개성 강한 요즘 아이들의 행태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문제는 피서를 거부할 정도로 게임에 중독된 거라면 이거야말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모두 떠난 빈집에서, 한 아이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하루종일 줄창 방에 틀어박혀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그리 활기차고 건강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요즘에는 리니지같은 RPG 게임에서부터 고스톱 같은 보드형게임이나 예전의 추억의 아케이드게임까지 그 종류가 무궁무진하고 다양하다. 한마디로 세상이 넓은 만큼 게임 종류도 다양하다고나 할까?

물론 게임도 잘 하기만 하면 프로게이머로 인기와 수입을 동시에 얻을 수 있고, 게임 시나리오작가나 게임테스터 내지는 게임기획 및 디자인 등등의 직종으로 발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일 뿐 앞으로 장래를 내다보며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워낙 요즘 아이들이 게임하기를 좋아하다보니 일부 과격한 학부모는 TV 안보기 운동처럼 아예 PC를 집안에서 추방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 학부모 중에는 회사 선배도 끼어 있었다.

"나는 초등학생의 경우 아직 컴퓨터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그래서 집에는 아예 PC가 없죠. 물론 TV도 없어요."

난 그 선배의 고충이 이해는 되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아이들을 너무 옛날 방식에 짜맞추려는 고집같아 보여 한마디 참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요즘은 초등학교 숙제도 워드로 쳐서 제출하는 세상이고 PC 다룰 줄 모르면 더더욱 살아가기 힘든 세상인데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너무 억압하고 통제하시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런 문제가 생길까 봐 일요일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PC방으로 가요. 2시간 정도 마음껏 PC로 하고 싶은 걸 하라구요. 난 초등학생들에게는 1주일에 2시간 정도만 부모 입회 아래 컴퓨터를 만질 수 있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아이들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컴퓨터보다 중요한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컴퓨터보다 중요한 유년시대의 추억들

선배에게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내 머리를 둔한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그리고 나서 홀린 듯이 내 유년 시절을 더듬더듬 기억해내려 애썼다. 동네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는데 너무 깊이 숨는 바람에 술래가 "못찾겠다 꾀꼬리"하는 소리도 못듣고 저녁 늦게까지 쪼그려 있던 기억들.

너무 재미있어 책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로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던 동화책의 추억, 고무줄 놀이하는 고무줄 끊고 달아나거나 여자애들 치마만 보면 들치며 '아이스케키' 하던 고약한 친구들의 밉상인 얼굴들, 모래알로 밥해먹었던 소꿉놀이의 추억, 흙 속에 고사리 손을 넣고 연신 두들기며 '두껍아 두껍아'를 외치던 기억들,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물속에 잠겨놓은 시원한 과일을 식구들과 함께 먹으며 "진달래먹고 물장구 치고"를 복창했던 기억들.

그러고보니 이 세상에는 컴퓨터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정말 많이 있었다. 그건 바로 유년시대의 추억이라는 이름의 단어였다. 휴가철 부모와 떨어져 혼자서 컴퓨터 게임에 빠진 학생의 추억 속에도 물론 각종 유닛들과 모니터 앞에 번쩍이는 시뮬레이션의 추억이 있겠지만 그 나이 또래에는 그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추억데이터의 저장이 필요해 보인다. 만약 저장된 유년시절 추억의 데이터가 별로 없어서 나이 들어서 하나씩 하나씩 곱씹어 보기 어려운 끔찍한 사태가 오지 않으리라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우리 사는 세상이 디지털이 만능인 시대라 할지라도 그래도 디지털 시대나 아날로그시대나 여전히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