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10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02 09:49수정 2004.08.0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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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후였다. 에인은 강 장수, 책임선인과 함께 말을 타고 성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공장이나 시장, 주거지를 피해 곧장 변두리로 내달렸다. 얼마가지 않아 곧 벌판이었다.


에인이 먼저 걸음을 늦추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벌판은 듣던 대로 거의 황무지와 같았고 키 작은 식물들이 가시관처럼 여기저기에 무더기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책임선인이 말고삐를 당겨 쥐며 말했다.

"글쎄 이곳이 전에는 농토였답니다."
"믿어지지가 않는군."

강 장수도 말머리를 한바퀴 돌려가면서 사방을 훑어본 뒤 그렇게 되받았다.

"인구는 2만도 되지 않는다는데, 수공업자가 5천이 넘는다니 농업이 이꼴이 되었겠지요."

책임선인은 그간 집계를 낸 것을 토대로 그렇게 설명했다.


"그럼 만든 물건들은 잘 팔렸다고 하던가?"

다시 강 장수가 물어보았다.


"아닙니다. 팔리는 제품보다 만드는 것이 더 많아 언제나 창고가 포화상태였다고 합니다."
"잘 팔리지도 않은 제품을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다시 강 장수가 물었다.

"애초 생각이야 만들기만 하면 다 팔릴 줄 알고 수공업을 장려했겠지요."

전 군주는 그렇게 수공업을 장려했지만 그러나 그 물건은 잘 팔리지 않았다. 우선 그 물품을 사주는 이웃국가에서 기술이 앞선 우바이드나 에리두 제품을 더 선호했던 때문이었다. 그래서 군주는 그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청금석 몇 톨을 수입하는데도 도기와 식기류 등을 한 마차씩 가져다주곤 했다. 그러니까 군주는 제품생산을 조절하는 대신 재고품 처리에만 신경을 썼던 것이었다.

"그래도 농. 목축만 살아 있다면 이 지경은 아니었을 텐데, 요즘은 양유와 염소젖까지 이웃 나라에서 사들이는 형편이랍니다. 이러다간 결국 양 한 마리에 도기 몇 마차씩 주고서야 맞바꾸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옛 군주의 집사가 말해주더군요."
"그렇다면 이곳 도시 계획은 처음부터 기형적이었단 말인데…."

그때까지도 에인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한 일이라도 있는가?' 책임선인은 그만 이야기를 끝내고 싶은데 강 장수가 계속해서 뒤를 이었다.

"자네 말은 우리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도시의 균형부터 잡아야 한다는 것이지? 그러자면 물론 농 목축업부터 부활시켜야 할 것이고? 하다면 연병장 군사들이 거의 농부나 목부였다고 하니 그들을 본업으로 돌려보내면 어떻겠는가?"

"오래 방치된 농토라 개간을 하자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게다가 이곳은 강줄기와도 거리가 멀어 애초부터 물을 대기도 용이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이 고장에선 어떤 곡식들이 재배되었다고 하던가?"
"밀과 붉은 수수라는데 그 알곡이 우리 것과 달리 길고 가늘며 또 끈기도 없었습니다."

강 장수는 흘낏 에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도 먼 들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입성식을 치르지 않아 도시 계획 따위는 아직 관심이 없는지도 몰랐다. 강 장수가 마침내 아퀴를 지어 말했다.

"그러면 농업이냐 목축이냐 등은 장기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풀어가도록 하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입성식인데, 그 행사준비는 언제까지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도시계획보다 먼저 치러야 할 것은 입성식이었다. 입성식을 치러야만 만천하에 새 국명과 새 주인을 선포할 수 있다. 그것이 에인에게는 물론 그 모두들에게 급선무였고 그래야만 국사는 물론 외교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강 장수, 내려가서 저 풀들을 뜯어오시오."

그때 에인이 별안간 그런 지시를 했다. 강 장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말에서 내려가 풀을 한 다발 뜯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장군님."

그러나 에인은 그걸 받지도 않고 되물었다.

"얼마 후면 그 풀이 얼거나 시들 것 같소?"
"벌써 한 두 차례 서리를 먹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두어 달 후엔 다 얼겠지요?"
"지난 해 경험으로 봐서 그럴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에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자, 강 장수, 책임선인, 지금 우리에겐 입성식이 급하지 않아요."

그때서야 강 장수는 알아차렸다. 에인은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전쟁이며, 들판의 풀을 뜯어오라고 한 것은 그 풀의 상태를 보고 날짜를 가늠하자는 것이다. 이제 강 장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치르실 생각이십니까?"
"그랬으면 좋겠소."
"다음 칠 곳은 어딘지요?"
"에리두요. 풀이 얼기 전에 끝내야 하오."

벌써 혼자서 구상을 다 끝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리두라니…. 강 장수가 방향을 돌려보았다.

"에리두는 아래쪽 끝이고 너무 멀지 않습니까? 보다도 가까운 키슈나 보르시파가 지정학적으로도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오, 그 도시들은 벌써 소문을 듣고 철통같은 수비로 들어갔을 것이오."
"그러니까 거리가 멀어 안심하고 있는 장소를 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가장 아래쪽인 에리두에 우리 천신의 하늘을 세운다면 그 사이에 있는 도시들은 자연히 천신의 백성이 될 것이오."

에리두만 아니고 그 사이에 있는 도시까지? 강 장수는 좀 아득했지만 곧 머릿속을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출정일은 언제쯤 잡고 계신가요?"
"그건 강 장수가 정하시오."
"군장비나 군사가 더 필요할 수도 있고, 그러면 별읍장께 도움을 청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한 두 달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우리의 힘만으로 치릅시다. 그리고 두 달은 너무 길어요. 한 달 후로 잡아주시오."
"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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