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11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03 08:55수정 2004.08.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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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장수는 그 기한이 너무 박하다고 생각하는데 에인이는 벌써 책임선인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책임선인은 먼저 군량을 비축하시오. 약 석달간은 버틸 수 있는 양이어야 할 것이오."


책임선인 역시 별안간의 지시라 당황해서 대답했다.

"당장 그 많은 식량을 한꺼번에 비축할 수 있을까요?"
"그럼 제후를 앞세워 사방에서 사들이도록 하시오. 그리고 강 장수는 당장 군사를 재정비하고 강 훈련을 시키시오."
"군사들이야 잘 먹여가면서 훈련을 시킨다면 그 효력을 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에리두라면 큰 도시인데 아무래도 군장비가…."
"무기는 여기서도 만들 수 있지 않소. 사방에 널려 있는 게 야장간이며, 그 일손들이라는데…."
"알겠습니다."
"할 수 있겠소?"
"최선을 다 해야지요."

그러자 에인이 말고삐를 휙 돌렸다.

"자, 이제 결정이 났으니 이만들 돌아갑시다."

강 장수가 그의 옆으로 말을 붙이며 확인 차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에리두를 친 후엔 입성식과 등극식을 갖는 거지요?"

에인의 대답은 이번에도 엉뚱했다.


"강 장수는 언제부터 그렇게 성미가 급해지셨소?"

강 장수는 그만 할말을 잃었다. 성미가 급한 것으로 치자면 에인이 한수 위이지 않은가. 전쟁을 치른 지가 엊그제인데 다시 전쟁, 그것도 한달 내로…. 아니야, 강 장수는 얼른 머리를 저었다. 가질 수 있다면 다 갖는 것이다. 이 세상 전체를 가진들 어떤가. 그래, 먼저 도시 두 개쯤 가지게 한 후 군주등극 식을 갖는다면, 재상도 별읍장도 초대한 자리에서 그런 행사를 치른다면 그 이상 빛나고 영광된 등극식도 없을 것이다.

에인은 천천히 걸으면서 강 장수의 옆얼굴을 살폈다. 편한 얼굴만은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나이 40이 넘은 장수에게 자기가 너무 큰 부담을 준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운명이었다. 한배를 탔을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오늘 아침이었다. 그는 혼자서 전승 보고식을 가지려고 책상 위에 옥함을 올렸다. 별읍장에게는 이미 전령을 보냈지만 태왕에게는 그런 식으로라도 따로 알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옥함을 열고 옥새와 임명장을 꺼내놓을까 하다가 그대로 두고 그 앞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그가 막 보고식을 가지려는 찰나에 옥함에서 먼저 빛이 흘러나왔다. 황색이었다. 그 빛이 자기 가슴 쪽으로 그윽하게 비춰오는가 했더니 곧 비단자락처럼 천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황색바탕에 자주색으로 쓴 역서까지 빛으로 깔리자 어디선가 옥새가 날아와 그 위에 사뿐히 앉았다.

그는 너무 신기해서 그것을 잡으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옥새에 조각되었던 오룡이 하나하나 꿈틀거리며 자기 자리에서 빠져나와 비단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 일렬로 길게 서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자 황금마차가 날아와 그들 등 위에 올려졌다. 전에 오룡거가 끌었던 그 황금마차였다. 용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를 실고 용들은 그의 앞으로 빙빙 돌았다. 에인은 얼른 무릎을 꿇었다.

'다섯 마리의 용, 하나의 마차…. 마마, 이제야 정확히 그 뜻을 깨달았나이다.
다섯 도시를 가졌을 때 그 임명장을 선포하라시는 뜻….'

그가 그렇게 태왕에게 자기 깨침을 아뢰는데 들려오는 소리는 태왕이 아닌 천신이었다.

'네가 너의 땅임을 선포한 도시에는 하늘 호수가 덮일 것이니라…. 그 하늘 호수는 영원토록 그 하늘 위에 머물 것이니라….'

'천신이시여, 에리두의 하늘부터 평정하겠나이다. 그리하여 제 손을 거부하던 그곳의 바다 신도, 어리석거나 기가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그 마술사의 신도 멀리 쫒아버리고 우리의 하늘 신이신 당신과 그 호수를 에리두 하늘 위에 번쩍 들어올리겠나이다.'

그 서약의 언어가 에인의 입에서 막 빠져나간 순간, 잠이 쏟아져왔다. 아주 짧은 잠에서 천년을 달리는 그런 신비한 잠이었다. 천신의 조화였다. 이번에 천신은 여와(환족의 유일한 여신)신을 보내 먼저 그의 노독을 씻어내게 했다. 수천년 전에 그러했듯이, 백성이 부족해 나라살림이 어려울 때, 진흙으로 수많은 생명을 만들어냈듯이, 이제 여와 신은 에인의 뼈마디와 근육에 새로운 생명수로 채워줘야 할 차례였다.

그간 에인은 인간의 노독이 너무 깊었다. 그래서 자칫 신성을 잃을 뻔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 반쪽 인간이 무너지지 않도록 강철 같은 생명력을 심어야 했다. 그리하여 여와 신은 에인의 핏줄을 타고 다니며 피로와 노독을 말끔히 씻어내고 신선한 생명수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씌어졌던 예전의 아지랑이 보호막도 아주 튼튼한 것으로 바꾸어주었다. 이제는 화살도 그 어떤 창도 그 얼굴을 뚫을 수 없을 것이었다.

에인이 눈을 떴을 때는 자기 몸이 날아다니듯 황홀했다. 발갛게 익은 얼굴도, 호수 같은 눈도 황홀에 푹 싸여 천상에 닿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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