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골 선산이 있고 차일봉이 있는데 차일봉 갈대밭엔 무수히도 헬기가 날았고 낙하산이 둥둥 떠다녔다.김규환
전기가 들어오고 3년째 되던 여름엔 거의 공사가 완료되었다. 물을 가두는 일만 남았지만 농사가 한창 때인지라 가을철로 늦춰 잡았을 뿐이었다. 우린 그 때를 기다렸다. 둑 안쪽은 곳곳이 긁어 놓은 흙 구덩이 사이사이가 방죽이 되었고 물이 고였다.
우리 마을에서 둑을 바라보면 있던 산이 없어지고 드넓던 들이 없어 전혀 다른 마을에 온 듯 그 높이가 소양강댐 높이만큼이나 높다. 둑 길이는 100m밖에 안 되는데도 어찌나 높아 보이던지 괴물 같은 60m 높이의 인공 건조물은 시골뜨기들에겐 중압감으로 다가왔을 터다.
그러면서 그 안에 내 잔뼈를 굵게 해 줬던 수많은 추억거리가 서서히 사라질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진기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지었던 소로골 논과 밭, 비까리, 평까끔 논, 그리고 골짜기 골짜기를 따라 나무하러 갔던 산길 초입이 있다.
폭은 좁지만 두 골짜기 안엔 미꾸라지 피리, 붕어, 메기, 쉬리가 있었다. 징게미, 새비(토하), 가재 천국이었다. 개구리와 두꺼비 그리고 온갖 뱀이 사람이 다니기 힘들도록 득실댔다. 여치, 메뚜기, 풀무치, 방아깨비, 베짱이 길 오가는데 심심치 않게 노래 불러 줬는데 그 아까운 것들을 모두 잃게 될 줄이야.
뿐이던가. 돌 하나 내 손때가 묻었고 바윗돌은 한 번 이상씩은 어루만져 줬을 게다. 풀 한포기 꽃 한 송이는 내 작은 눈에 선명히 박혔다. 몇 미터 눈을 감고 걸어도 넘어지지 않았고 꼭 오르막길 그 자리엔 버드나무가 있었고 팽나무가 있었다. 뽕나무는 오디를 선물했다.
둑이 만들어진 그 자리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1년 전쯤까지는 거기도 삼거리라고 열 집도 안 되는 방촌마을을 두고도 주막이 있었다. 고려 시대 적에나 나올 법한 그런 주막 말이다. 그래 내 과거의 상당 부분-절반 이상은 수몰되고 말았다. 굽이굽이 도랑 따라 걷다 보면 콧노래가 절로 나왔던 아련한 추억을 저수지가 모두 곧 삼킬 태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