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이 잡아 별식 즐긴 여름 밤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65]그날 우리가 잡은 건 부드럽게 혀에 감겼다

등록 2004.08.03 19:21수정 2004.08.0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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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이 잡기는 맨땅에 해딩하기보다 쉽습니다. 그냥 손을 요리조리 넣고 훑어나가면 됩니다. 언제 그런 날이 또 있으려나?
우렁이 잡기는 맨땅에 해딩하기보다 쉽습니다. 그냥 손을 요리조리 넣고 훑어나가면 됩니다. 언제 그런 날이 또 있으려나?김용철
대사리 다슬기나 까재(가재), 찡거마리(징게미), 새비 토하(土蝦), 뱀장어는 주인이 따로 없었다. 미꾸라지도 주인이 있는 수렁논 빼고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가족 중에서 어느 곳에 가면 어떤 고기가 많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으면 물을 품든가 돌을 떠들며 잠깐의 수고만 하면 되었다. 누구 냇가가 없고 누구 보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니 눈치 볼 일도 없었다. 짬을 내 부지런만 떨면 식구들 입맛도 돌게 하고 대가족 영양실조는 면할 수 있게 했던 시절이었다.


우렁이는 달랐다. 우렁이는 방죽에나 가야 있다. 방죽은 개천도 아니요, 냇가도 아니며 보(湺)도 아니다. 봇도랑은 더더욱 아니며 시냇물이 흐르는 깔끔한 곳도 아니다. 내 고향에서 불렀던 툼벙은 보아래 움푹 팬 물이 고인 곳이다.

방죽은 본디 방축(防築)인데 주인이 따로 있다. 그 주인은 그것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시시때때로 방죽을 지켜야 한다. 자칫 한눈팔다가 아이들이 들어와서 미꾸라지나 우렁이를 잡는다고 괭이나 삽으로 툭 터버리곤 하는데 한번 가둔 물을 다시 채우려면 여간 공이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저 멀리 논에서 김을 매다가도 방죽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있으면 삽자루를 들고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한다. 어찌나 급하던지 논두렁, 논바닥을 가로질러 뛰어와 “이놈들!” 하며 멱살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쫓아내는 게 방죽에 대한 애정이고 관리 방식이었다. 그마저 우리 마을엔 열댓 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두 개 있었으니 방죽엔 겨울에 나무하러 오가다가 얼음 위를 둥둥 뛰어 다니며 즐겨보는 게 다였다.

방죽은 좁은 골짜기에 논에 댈 물을 가두려고 3, 40평에서 100평 미만으로 만든 작은 연못이다. 그 연못을 굳이 저수지(貯水池)라 부른들 내가 뭐라 하겠는가. 다들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다르고 눈썰미에 차이가 있다고 하자. 다만 방죽이 몇 배로 커지면 저수지(貯水池)이고 역사책에서 배운 것처럼 의림지나 벽골제(堤)다. 상수원으로 쓰는 대형 시설을 수원지(水源池)라 부르고, 규모가 더 커서 유람이 가능한 드넓은 대형 댐을 호수(湖水)라 부르던가.

하여간에 여름 장마 지속되면 나뭇가지, 나뭇잎, 풀 더미가 떠내려 와 방죽에 둥둥 떠 있다. 잠시 비가 멎으면 가죽 양동이 하나에 쇠죽바가지와 찌그러진 양재기를 들고 방죽으로 갔다. 소나기 내리던 8월도 좋다. 늦가을이 되기 전까지 여름철에 주로 했던 행사다.


형과 내가 조씨들 제각(祭閣) 위에 있는 방죽에 쉽게 갔던 건 이유가 있었다. 당시 한국국민당(총재 유치송) 화순곡성담양 중선거구 후보였던 아무개를 도와 그 집 아저씨와 아버지가 함께 선거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우린 외딴집을 지나다가 주인이 나타나 “뭔 일이냐?” 그러면 “아제, 우렁 좀 잡을라그요”나 “아짐이쇼? 우렁 째까만 잡게라우”하면 “방죽을 트지는 말아라”하시며 순순히 보내주었다. 무사통과되는 특권이 아니고 무엇인가.


예전엔 제각 아래에 민가가 하나 있었는데 헐리고 없군요. 그곳에서 혼자 1년 살던 때도 있었답니다. 제각과 감나무가 보이는 오른 쪽 위에 방죽이 있었습니다.
예전엔 제각 아래에 민가가 하나 있었는데 헐리고 없군요. 그곳에서 혼자 1년 살던 때도 있었답니다. 제각과 감나무가 보이는 오른 쪽 위에 방죽이 있었습니다.김규환
컹컹 짖는 개가 뒤를 따르지만 곧 주인에게 가버리고 산막을 지나 제각 위쪽으로 50여 미터만 더 오르면 방죽이 있다. 방죽 위엔 겉은 녹색인데 배아지가 시뻘개 공산당이라 불렀던 무당개구리가 천지다. 제들도 심심한 건지, 오후 느지막이라 산소가 부족해선지 까뒤집기를 반복한다.

꽃창포와 고마리 따위 물풀이 가장자리를 감싸고 있다. 가져온 도구를 풀숲에 던져두고 풀을 위로 걷어 올린다. 일부러 긴바지를 입고 손에 토씨를 했으니 온몸이 젖을 각오로 방죽 안으로 들어간다.

“물컹” 수렁에 폭 빠진 느낌이다. 비릿한 방죽 수렁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찌른다. 먼저 들어간 형이 “야 규환아 쩌기 바가치 갖고 와” 하면 나는 주위에 나뒹구는 양동이와 바가지를 가져다주고 나도 합류해 안으로 들어갔다.

흙탕물이 되지 않게 조심조심 손을 넣어 쑤욱 밀어 넣으면 목덜미까지 물이 잠긴다. 어차피 버리기로 한 몸이다. 집에 가면서 냇가에서 멱 감고 돌아가면 아무 문제가 없으니 옷이 젖는 건 개의치 않았다.

물 속은 아무리 조심해서 다녀도 바닥에 깔려있던 흐레가 일어나선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 속을 더듬더듬 하다가 문득 손에 만져지는 감각으로 우렁이를 하나씩 건져 올리는 수밖에 없다.

“야, 여깄다.”
“어디? 큰가?”
“솔찬히 크구만.”

내 작은 손에 가득 찰 정도로 큰 것이었다. 나도 힘을 내 더 열심히 뒤져갔다. 하나를 잡으면 발을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서 열댓 마리는 잡을 수 있으니 맨 처음 걸 발견하면 그 뒤론 쉽다. 몇 번 더 눈을 감고 딱딱한 것이 만져지기를 고대하며 슬슬 손을 움직이자 내 손에도 드디어 딱딱한 감각이 느껴졌다.

“성! 성! 나도 잡아부렀어. 허벌나게 큰디.”

우렁이 입은 커다란 비닐 막이 쳐져 있다. 빙글빙글 다섯 바퀴 쯤 돌며 급속히 작아지며 꽁지부분으로 아이 응가모양으로 간명하게 마무리 했다. 날것을 좋아하는 지라 생으로 먹어볼까 하다가 형이 뭐라 할까봐 참으니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잡히면 바로 “톡” 던져두고 다시 손을 담가 우렁이를 잡아나갔다. 1시간여 공을 들이니 내가 잡은 건 한 되가웃 되었고 두 살 위 셋째형은 세배나 잡았다. 양동이에 훅 털어 넣고 몸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들어왔다.

“엄마!”
“응, 어디 갔다 왔냐?”
“거시기…지각(제각) 방죽에서 우렁 잡아왔어라우.”
“어디 보자. 워메 참말로 많이 잡았네. 마침 국을 뭘 끓일까 생각하고 있었는디 잘 됐구먼.”

옷을 갈아입는 짧은 시간이 흘렀다. 여름밤은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고 우리 집 마당에 발간 햇볕 한 줌을 아름답게 비춰주고 있었다.

어머니는 급히 먹을 일부를 꺼내 득득 문질러 씻고 나머지는 해감을 해뒀다. 당일 먹을 양엔 놋수저를 두개나 담갔다. 물이 팔팔 끓자 으깬 된장을 푹 집어넣는다. 우렁이를 되가웃 넣어 적당히 익어가자 야들야들 잘 자란 솔(부추)을 한번만 썰어 넣는다.

마루에 걸터앉아 저녁을 먹는 행복한 시간이 다가왔다. ‘푸시푸쉬’ 콧바람을 내가며 쇠죽을 먹는 송아지와 벌써 배부르다고 저녁잠을 청하는 까만 돼지가 유달리 예뻐 보였다.

“셋째야 상 가져가라.”
“예.”

아버지 몫만 따로 퍼 드리고 우린 큰 양푼에 그냥 담겨져 있다. 비닐 막을 떼어 내고 미리 준비한 탱자나무 가시로 나사형태를 봐가며 슬슬 돌려 끄집어내자 푸르스름한 속살이 큼지막하게 빨려 나온다. 탱자가시를 내려놓고 입 안에 쏘옥 밀어 넣었다.

베어 물자 중국산이나 양식(養殖) 우렁이 씹는 맛-딱딱한 고무 씹는 기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혀에 감긴다. 두세 번 씹자 입안 가득 약간은 쌉싸래하면서도 껍질에 엉겨 붙은 된장 알갱이가 어울려 논다. 보드라워진 부추를 한 젓가락 넣으니 그마저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국물 한번 떠먹고 우렁이 하나 빼먹고 내 손엔 국물에 된장 범벅이 되었지만 밥 한 술 뜨지 않아도 배가 불러왔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누가 많이 까먹는지 내기를 하는 아이들과 오랜만에 별미를 드시는 부모님. 그렇게 여름 짧은 밤이 시작되었고 마당에선 모깃불이 ‘사르르’ 소리를 내며 피어올랐다.

어디 자연산 우렁이 없을까?

용처라 탱자나무 가시 하나 꺽어 오니라.
용처라 탱자나무 가시 하나 꺽어 오니라.김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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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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