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흑염소탕으로 보신해요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66]보신탕보다 더 좋은 흑염소탕 잔치

등록 2004.08.05 19:17수정 2004.08.0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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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한마리 한솥 가득 끓여 먹고 먹고 또 먹고.
염소 한마리 한솥 가득 끓여 먹고 먹고 또 먹고.김규환
“저 저 저… 저 잡아 죽일 놈!”


장독대 된장 항아리 위에 올라가 제멋대로 발을 콩콩 찍어 놀고 있는 염소를 본 아버지가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다.

“우여~저 망나니가 안 내려오고….”
“달그락~ 달그락~”
“덜컹!”
“쨍그랑”
“저 놈을 이참에 잡아버려야지 원….”

득득 문질러 염소를 씻습니다
득득 문질러 염소를 씻습니다김규환
풋나무를 베어오신 아버지 앞에 염소는 웬수였다. 그 뒤로 간장독 뚜껑 없이 몇 년을 지냈다. 아버지와 나는 사립문을 걸어 잠그고 염소 뒷다리를 잡아채 우리에 가두느라 20여 분을 허비했다. 아버지는 염소에게 고삐를 다시 걸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 염소란 놈은 걸핏하면 지붕엘 오르질 않나, 담벼락에 올라 담을 허물어 놓는다. 매어둔 염소가 말목을 스스로 뽑아 남의 밭에 가서 곡식을 죄다 뜯어 먹는 바람에 집안 싸움 그치지 않기도 하거니와 여름철에는 서로 엉겨 붙는다. 고약한 성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청개구리보다 더 미운 짓거리를 일삼는다. 또한 겨울철에는 외따로 떨어져 있어 얼어 죽게까지 하니 염소는 참 못된 놈들이다.

그날 그 사건이 없어도 복더위에 어차피 잡을 생각이었지만 사고까지 치니 현장에서 바로 잡기로 결정을 내린 것뿐이다. 그날이 흑염소 제삿날이 되었다. 멀리 끌고 갈 필요도 없이 다리께로 갔다.


“소금 한 바가치 가져 오니라.”
“예.”

입을 벌려 굵은소금을 두어 줌 밀어 넣고 구리선 전깃줄이 없어 고무줄로 입을 칭칭 감아주니 1분도 채 안되어 죽고 말았다. 얼마나 간단한가. 목을 매달 필요도 없고 질질 끌고 갈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죽일 때 학대란 있을 수 없다.


소금을 먹이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죽는 동안 소금이 온몸에 퍼지게 하여 특유의 노린내를 조금이라도 없애고자 함이요, 둘째는 그냥 편하게 질식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개는 소나무나 다리난간에 묶어 놓고 근육이 부드러워지라고 몽둥이로 두들기며 질식을 시키는 광경을 여러 번 봤지만 염소는 그렇게 힘들여 잡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전라도식은 고사리, 토란대, 고구마순 말린 걸 불려서 넣어 푸성귀가 듬뿍 들어갑니다.
전라도식은 고사리, 토란대, 고구마순 말린 걸 불려서 넣어 푸성귀가 듬뿍 들어갑니다.김규환
아버지는 뻣뻣하게 죽은 염소 뿔을 잡아 어깨에 메고 냇가로 내려가셨다. 헌 짚 가마니를 씌우고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외양간 위쪽에 올려진 짚다발 한 단과 작대기 두개를 들고 뒤따랐다. 일단 작대기를 돌담에 나란히 꽂고 짚 가마니를 씌워 올렸다.

오후 2시 짚에 불을 살라 태우니 가마니가 활활 타는데 털 타는 냄새가 확 밀려온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열기와 불기운이 만나 땀이 질질 흐른다. 이어 짚 끝에 불을 붙여 막대기로 살갗을 문질러가며 말끔하게 털을 제거했다. 뿔을 뽑고 발굽을 탁탁 쳐서 뽑아주니 헐벗은 염소로 바뀌었다.

그 사이 나는 다시 집으로 달려가 소금과 칼, 삼학소주를 함지에 챙겨왔다. 아버지는 남겨둔 짚 한줌으로 물에 담가 쓱쓱 문질러 주고 무쇠 칼로 배를 갈라 위장을 덜어내신다. 30여kg 나갈 듯싶던 염소가 스무 근 남짓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쳐다보고 있었다.

맹물에 한바탕 끓여서 물을 버리고 나서 끓이면 고기도 일찍 익고 냄새도 덜합니다.
맹물에 한바탕 끓여서 물을 버리고 나서 끓이면 고기도 일찍 익고 냄새도 덜합니다.김규환
“간 묵을텨?”
“냄시 많이 나는디라우~”
“글도 묵어봐. 몸에 좋은 것이여.”

마을에서 돼지나 소를 잡을 때도 간은 늘 내차지였다. 빈혈도 빈혈이거니와 5학년 이후론 기력이 너무 떨어져 인근 세 마을에서 무얼 잡는다면 아버지는 언제나 내 몫으로 간을 도맡아 오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간을 바로 떼어 칼로 잘라 주신다. 굵은 소금에 찍어 먹었다. 피가 질질 흐른다.

“흐미 노랑내 허벌나게 나부요.”
“소금 몇 개 더 묵거라. 이 것도 먹어 볼겨?”
“뭣인디라우?”
“골이다.”
“디게 징그러운디라우."
"너한테는 좋은 거란다.”
“째까만 짤라 주싯쇼.”

돼지불알을 된장에 삶아 포근포근함을 느껴보기는 했지만 물컹물컹 느글거리는 골마저 날것으로 먹기는 난생 처음이다. 별 희한한 고기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약해빠진 나로선 당신께서 주시는 대로 받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해롱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고추물과 들깨물을 확독에 갈아 넣으면 국물이 끝내줍니다. 생강과 마늘도 푹푹 찧어야겠지요.
고추물과 들깨물을 확독에 갈아 넣으면 국물이 끝내줍니다. 생강과 마늘도 푹푹 찧어야겠지요.김규환
아버지와 내가 밖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각 어머니는 더 바쁘시다. 바깥에 솥을 따로 걸고 고사리, 고구마순 말린 걸 담가놓고 토란대를 삶아 놓으셨다. 고추를 꺼내 다듬어 갈고 들깨를 갈아 육수를 준비한다. 된장도 확독에 갈아 체로 바쳐 놓았다.

개먹었다는 소문이나 동네에서 개 끄슬리는 냄새만 나도 싸움까지 하셨던 어머니와 아버지. 그래도 염소는 어머니께서 집에서 1년에 한번은 꼭 손수 탕을 끓여주셨다. 내가 먼저 고기를 들고 오는 사이 아버지는 마저 내장을 손질하고 뽕잎을 한 줌 따서 오셨다.

고기를 먼저 물만 붓고 한번 끓여 낸 다음 다시 물을 조금 붓고 된장기를 하여 삶았다. 그래야 냄새가 덜 난다고 하셨다. 감나무 배나무 사이에 걸린 백철 솥에 불 땠다. 그일은 내가 했다. 그늘 밑에서 불을 때서 그런지 땀이 나오자마자 말라버리니 오히려 건조한 느낌이다.

수컷은 냄새가 보통이 아닌데 반드시 그것은 버리고 여기에 초피와 뽕잎, 칡뿌리를 조금 넣으면 냄새는 말끔히 가십니다.
수컷은 냄새가 보통이 아닌데 반드시 그것은 버리고 여기에 초피와 뽕잎, 칡뿌리를 조금 넣으면 냄새는 말끔히 가십니다.김규환
어머니께서는 나물을 먼저 넣고 고춧물, 들깨 물에 마늘과 생강을 찧어서 넣고 말려둔 칡뿌리를 두 토막 넣고 마지막으로 뽕잎과 초피(산초와 비슷한 야생 향신료로 제피, 잼피, 좀피라고도 불림) 잎을 한 줌 따서 넣으셨다.

바로 옆집이 큰댁이라 할머니와 큰아버지를 모셔와 마당에 덕석(멍석)을 깔고 상차림을 도왔다. 온 가족이 남녀 따로 두 상에 모이자 고기는 푹 익어가도록 놔두고 도마를 놓고 내장을 썰어 부위별로 먹었다.

"어이 한 다리 건져오소.“
“앞 다리로 건지끄라우?”
“그려.”

어머니는 찬물 한 그릇을 떠놓고 손으로 툭툭 찢어 가났다. 이미 배가 불러왔지만 추어탕과 양탕을 끓일 때는 해가 지도록 앉아서 두세 그릇은 비워야 뭔가 먹었다는 느낌이니 긴 여름날 4시 반부터 시작된 집안 잔치는 해가 떨어진 8시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내장을 먼저 꺼내 먹는데 여기엔 위장, 염통, 간, 지라, 창자, 허파, 양 등 부위별로 먹으면...
내장을 먼저 꺼내 먹는데 여기엔 위장, 염통, 간, 지라, 창자, 허파, 양 등 부위별로 먹으면...김규환
“시숙 더 드리끄라우?”
“멀국(국물의 고향 말)만 더 주싯쇼.”

우리 집은 염소와 인연이 깊다. 어릴 적엔 하얀 염소를 한 두 마리는 꼭 길렀다. 셋째형이 스물 중반이 되면서 흑염소를 산골에 풀어두고 150여 마리를 기르기도 했다. 복숭아와 고등어만 먹어도 두드러기가 나는 어머니는 육 고기 종류는 염소만 드셨다.

들깨를 갈아 넣어 걸쭉한 국물에 태양초 고추를 갈아서 매콤했다. 여기에 매옴한 풋고추 푹푹 썰어 넣으니 알딸딸하다. 생강과 초피는 기본이고 뽕잎, 칡뿌리로 냄새를 제거하니 숫염소라 하더라도 소고기국보다 냄새가 덜하다.

육질은 얼마나 쫄깃쫄깃한가. 게다가 거섶까지 종류별로 들어 있으니 여기에 밥 두어 숟가락 말아 먹으면 정말이지 개고기가 부럽지 않고 산해진미가 필요 없다. 그렇게 배터지게 먹어도 소화도 잘 되니 금상첨화요, 철분이 듬뿍 들어 있으니 산후조리에 좋다. 더군다나 월 1회 월경을 하는 여성들에겐 이보다 좋은 음식이 없다.

도마 위에서 뜨끈할 때 썰면서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도마 위에서 뜨끈할 때 썰면서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김규환
이것도 집안 내력이라고 누나네 집안에도 개고기를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셋째형은 매형과 누이, 조카들을 고향마을로 휴가 오는 조건으로 매년 한 마리를 걸어 유혹을 한다. 덤으로 나까지 보신을 톡톡히 하고 올라오니 언제나 고향으로 가는 휴가는 입이 즐겁다.

더위 먹을 때 보양식으로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는 보양탕은 2~3%인 태양인에게만 어울리지 않으니 올 여름 막바지 더위와의 전쟁은 개를 들먹이지 말고 흑염소로 정하자. 다만 가격이 개 값의 두 배 정도나 되는 게 흠이겠다.

다시 하나 꺼내 쫙쫙 찢어 먹어보세요. 칼날이 들어 가는 것보다 훨씬 먹기 좋습니다. 한 사람 고생해야 하는데 이건 남자가 맡아서 하면 더 분위기도 좋습니다.
다시 하나 꺼내 쫙쫙 찢어 먹어보세요. 칼날이 들어 가는 것보다 훨씬 먹기 좋습니다. 한 사람 고생해야 하는데 이건 남자가 맡아서 하면 더 분위기도 좋습니다.김규환
이글거리는 불과 태양을 보면 입추가 며칠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이글거리는 불과 태양을 보면 입추가 며칠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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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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