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방학에 건빵이 없었더라면...

[어릴 적 허기를 달래주던 먹을거리 18]벽지학교에서 나눠준 콩 박힌 빵과 건빵

등록 2004.08.06 15:34수정 2004.08.0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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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을 얼마 전에 먹어보니 꽤 맛있었습니다.
건빵을 얼마 전에 먹어보니 꽤 맛있었습니다.김규환
나보다 두 살 많은 셋째형은 학교에서 인기가 무척 좋았다. 왕이었다. 선생님 여덟 분과 소사 아저씨 한분 다음이었다. 서열상으론 학생회장에는 밀리나 실질적으로는 더 막강했다.


형은 4학년 때부터 호랑이 선생님 눈에 띄었다. 키도 크고 동무들을 아우르는 실력이 남달랐기 때문일까. 5, 6학년 선배들이 떡 버티고 있는데도 형은 모두를 물리치고 담임이었던 범병선 선생님의 든든한 후원으로 건빵 창고 열쇠를 거머쥐었다.

그 열쇠를 가진 사람은 부러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선배들은 "저 새끼가…" 하면서 1, 2년 후배에게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 수모가 말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기 대상이었다. 선후배들이 줄줄 따랐다. 그것도 3년이나 장기집권을 했으니 창고에 든 빵과 건빵은 거의 형 거나 다름이 없었다. 조수도 한 명 맘대로 부릴 수 있었다.

반장도 아니면서 일약 곳간을 맡은 비결이 놀랍기도 하다. 응당 형은 청소에서 제외되었다. 청소를 마치고 건빵이나 빵을 받아들고 집으로 급히 달려가는 아이들을 위해 형은 미리 창고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학년 대표들을 기다린다. 화순에서 빵이 오면 옮기는 건 5, 6학년 몫이니 별로 힘들 것도 없었다.

등사실과 바로 맞닿아 있던 창고는 언제나 그늘져 있었다. 곰팡이 냄새와 잉크냄새가 교묘히 뒤섞여 맛이 이상야릇했지만 그것 받아먹는 재미로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도 많았다. 오죽하면 다섯 살 아래인 내 여동생은 빵 안 준다고 2년이나 꿇어 3년 동안이나 1학년 생활을 했을까 보냐. 80년도에 우리 학교도 빵을 나눠주지 않았으니 누구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이번 휴가 때 복도에 들어가 봤습니다. 폐교가 다 그렇지요.
이번 휴가 때 복도에 들어가 봤습니다. 폐교가 다 그렇지요.김규환
청소가 끝나기도 전에 학년마다 두세 명씩 오면 학생 수에 맞춰 한가마 또는 반 가마씩을 분배한다. 6반이 총 학급수니 간단한 일이지만 어깨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2학년 초까지는 누런 콩 한두 개 박힌 빵이 나왔는데 그 때는 결석한 아이들 숫자를 빼고 개수대로 나눠주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건빵으로 바뀐 게 형이 첫해 '건빵잽이'를 시작한지 석 달 때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특히 여름철에는 푸석푸석하며 곰팡이가 탱탱 슬어있는 건빵이었다. 건빵으로 바뀐 뒤로는 소위 재량이라는 것이 통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형에겐 더할 나위 없었을 게다. 게다가 자신이 속했던 4학년, 진급하여 5, 6학년이 될 때까지 내리 3년을 어쩌면 자신의 학년에겐 더 많은 양을 주었을 지도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은 당시 콩은 동물 사료에나 넣어주던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걸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그러니 싼 비지떡-누런 콩 반쪽이 한두 개 박힌 빵이었다. 그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시골벽지 학교까지 비포장도로로 장거리 수송이 가능하고 오래 보관하려면 앙꼬(팥소)나 크림을 넣지 않은 빵이 제격이었음에 분명하다.


마침 한국에선 미국이 밀가루를 무상원조 한다는 터에 밀 재배를 모두 포기하고 쌀농사만을 지어나가던 때다. 게다가 2500여 종이나 되는 콩 유전자를 우리나라에서 수집해간 미국에게 우린 식량주권을 고스란히 내준 계기가 되었으니 기가 막히는 역사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빵은 맛있었다. 약간은 쉰 듯하면서 술맛이 나는 빵은 잘 구워진 편이었다. 크기도 어른 두 손바닥에 안길 만한 크기라 물 없이도 목이 잠기지 않고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간편히 먹을 수 있는데다가 70년 대 후반 학생들에겐 비상식량이었다. 먹기를 멈추고 집에 가서 형제자매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나눠 먹기도 했다.

건빵은 달랐다. 생기기도 좀생이처럼 생겼다. 물 없이는 두세 개 넘기기가 겁나도록 건조했다. 숨이 막히면 학교 우물가에 가서 벌컥벌컥 물을 마셔야 되는 고약한 것이니 우리에겐 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장마철이면 푸른곰팡이에 빨강 노랑곰팡이의 온상이 건빵이었으니 왜 그리 보관을 했는지 지금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잡초가 무성하게 들어찬 교정, 동문회에서 어떻게 해보던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잡초가 무성하게 들어찬 교정, 동문회에서 어떻게 해보던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김규환
'건빵잽이'형이 부대자루를 찢어 숫자대로 팍팍 부어주면 학년별로 교실로 갖고 간다. 여름엔 물청소, 겨울엔 마른 걸레 청소를 다 마쳐놓으면 책상 위는 물걸레질을 해놓아 말끔하다. 그래도 학생들은 책상 위에 공책이나 플라스틱받침을 깔고 당번이 나눠주기를 기다렸다.

손가락으로 "한나 둘 셋…열아홉 스물" "맞지?" "지달려봐…" 혹여나 하나라도 빠트릴까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자기 몫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 주머니에 쑤셔 넣고 책보를 두르고 집으로 뛰었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흐물흐물하고 곰팡이 냄새와 잉크 냄새에 절어 절반은 버릴 때도 있었으니 울며 겨자 먹는 것보다 먹기가 힘겨웠다. 그래도 우린 산간벽지 학교라 그거라도 오래 받아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내가 4학년 때 방학식이 있던 날 형네 담임선생님께서 키가 제일 큰 성호를 불렀다.

"쩌기 관사 뒤로 오니라."
"왜라우?"
"뭐냐, 거시기 내가 너희 마을 급우 몇 놈들한테 줄 게 있단다."
"예…."
"저기 푸대자루에 든 것이 건빵인께 늬기들끼리 나눠 먹어라."
"고맙구만이라우."

25kg들이 한 가마니를 받아 놓고 양지마을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 뒤뜰로 갔다. 흑염소 한 마리와 닭 열 마리를 기르셨던 선생님은 날마다 학교에 나와서 풀을 뜯기고 모이를 주라고 하셨다.

그런 계약이 있던 후로 우리 동네 아이들은 번갈아 가며 학교로 가서 선생님 가축을 돌봤다. 방학이 끝나고 반 가마를 덤으로 더 주셨다. 옆 강례마을 아이들은 우리를 무척이나 부러워했지만 우린 절대 나눠주지 않았다. 욕심쟁이였으니까.

그해 여름방학 때 그 건빵이 없었더라면 꽤나 심심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결코 형이 나에겐 빵 쪼가리 하나도 더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건빵 안에 든 별사탕은 참 맛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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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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