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가 무성하게 들어찬 교정, 동문회에서 어떻게 해보던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김규환
'건빵잽이'형이 부대자루를 찢어 숫자대로 팍팍 부어주면 학년별로 교실로 갖고 간다. 여름엔 물청소, 겨울엔 마른 걸레 청소를 다 마쳐놓으면 책상 위는 물걸레질을 해놓아 말끔하다. 그래도 학생들은 책상 위에 공책이나 플라스틱받침을 깔고 당번이 나눠주기를 기다렸다.
손가락으로 "한나 둘 셋…열아홉 스물" "맞지?" "지달려봐…" 혹여나 하나라도 빠트릴까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자기 몫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에 주머니에 쑤셔 넣고 책보를 두르고 집으로 뛰었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흐물흐물하고 곰팡이 냄새와 잉크 냄새에 절어 절반은 버릴 때도 있었으니 울며 겨자 먹는 것보다 먹기가 힘겨웠다. 그래도 우린 산간벽지 학교라 그거라도 오래 받아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
내가 4학년 때 방학식이 있던 날 형네 담임선생님께서 키가 제일 큰 성호를 불렀다.
"쩌기 관사 뒤로 오니라."
"왜라우?"
"뭐냐, 거시기 내가 너희 마을 급우 몇 놈들한테 줄 게 있단다."
"예…."
"저기 푸대자루에 든 것이 건빵인께 늬기들끼리 나눠 먹어라."
"고맙구만이라우."
25kg들이 한 가마니를 받아 놓고 양지마을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 뒤뜰로 갔다. 흑염소 한 마리와 닭 열 마리를 기르셨던 선생님은 날마다 학교에 나와서 풀을 뜯기고 모이를 주라고 하셨다.
그런 계약이 있던 후로 우리 동네 아이들은 번갈아 가며 학교로 가서 선생님 가축을 돌봤다. 방학이 끝나고 반 가마를 덤으로 더 주셨다. 옆 강례마을 아이들은 우리를 무척이나 부러워했지만 우린 절대 나눠주지 않았다. 욕심쟁이였으니까.
그해 여름방학 때 그 건빵이 없었더라면 꽤나 심심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결코 형이 나에겐 빵 쪼가리 하나도 더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건빵 안에 든 별사탕은 참 맛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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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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